
[유성현 기자] 박충식은 지난 2003년 33살의 나이로 정든 유니폼을 벗었다. 팬들은 '현역 시절 무리한 연투로 혹사당해 선수 생명이 단축됐다'며 안타까워했다. 1993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선보였던 '투혼의 181구' 15회 완투 피칭도 결정적 원인으로 꼽혔다.
하지만 그 때의 빛나는 순간들은 정작 본인에게는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아직도 '투수 박충식'을 기억하는 팬들에게 당시 경기가 뇌리 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무리한 투구로 몸에 이상이 생긴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가 남긴 불같은 투혼은 한국 야구사에 길이 남을 최고의 순간 중 하나였다.
이제 박충식은 제3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 호주라는 낯선 나라에서 사업에 도전하며 얻은 값진 경험들을 이제 야구에 뿌리내려 또다른 도전을 꿈꾸고 있다. 국내 첫 다문화 야구단 감독을 맡아 8년 만에 야구계로 돌아온 열정은 그 누구보다 뜨겁다. 야구인 박충식의 '최고의 순간'은 18년 전 마운드 위에서 멈추지 않은 채 여전히 진행 중이다.

◆ 181구 혹사 논란 "후유증? 오히려 잊지 못할 소중한 기억"
'투혼의 181구' 이면에는 자신의 고향 광주가 연고지였던 상대팀 해태 타이거즈에 대한 미묘한 감정도 섞여있다. 광주상고(현 동성고) 시절 주목받는 투수로 이름을 날린 그였지만 해태는 지난 1993년 신인 1차 지명으로 광주일고 '야구 천재' 이종범을 데려갔다. 삼성에 둥지를 튼 그는 유독 해태를 상대로 펄펄 날았고, 그 기세는 한국시리즈까지 갔다.
"광주 출신이라 해태 선수들의 플레이 스타일을 잘 알고 있었던 게 한 몫 했죠. 시즌 끝나고는 광주에 가서 (이)종범이나 (홍)현우 등 해태 선수들을 만났어요. 저보고 거의 미쳤다고 했죠.(웃음) 해태 팬들은 저희 집 벽에다가 '박충식 배신자'라고 낙서도 했어요. 몇몇 팬들은 '왜 저런 놈이 이종범하고 겹쳐가지고…'라며 아쉬워했죠. 대구보다 광주에서 더 유명세를 치렀던 것 같아요.(웃음)"
하지만 박충식은 당시 경기를 정점으로 서서히 야구 인생의 내리막길을 걸었다. 고질적인 어깨 부상이 원인이었다. 끝없는 통증과 재활을 반복하던 중 결국 2003년 은퇴를 결심했다. 당시 나이 서른 셋, 베테랑 투수의 노련한 피칭을 보여줄 수 있었던 시기였다. 팬들은 무리한 피칭이 이른 은퇴의 원인이 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이 같은 논란에 대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위에서는 그 경기로 몸이 망가진 게 아닌지 물어봐요. 하지만 저는 이듬해에도 데뷔 시즌과 똑같이 14승을 올렸죠. 당시에는 학창시절부터 저보다 많이 던진 선수들도 있었어요. 선수로서 그런 잊지 못할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아요.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도 없었고, 그 경기로 저를 기억해 주시는 팬들도 계시니 야구 인생의 정말 소중한 기억이죠."

◆ 은퇴 뒤 호주서 사업가 변신 "그래도 난 천상 야구인"
박충식은 은퇴 직후 가족이 살고 있던 호주로 떠났다. 하지만 20년 넘게 야구밖에 모르고 살던 그에게 낯선 곳에서의 생활은 막막하기만 했다. 외로운 재활과 싸움, 가족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서둘러 건너왔지만 야구의 존재감은 상상 이상으로 컸다.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다 보니 가족과 시간을 못 보내 미안했죠. 일 년에 한 번 밖에 얼굴을 못 비춰 아빠 노릇도 제대로 못하고…. 정말 많이 힘들었죠. 그런 점들이 은퇴 결정을 빨리 하게 된 이유가 됐어요. 결국 은퇴식도 안하고 조용히 호주에 오긴 했는데 정말 막막하더라고요. 야구를 그만뒀다는 생각에 6개월 정도는 거의 패닉 상태였죠."
쉽사리 말도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새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언어의 장벽을 허물기 위해 바닥부터 직접 부딪치며 적응하기 시작했다. 식당 운영부터 시작했던 사업은 일식가게, 마트까지 확장돼 다행히도 잘 풀렸다. 하지만 사업가 박충식의 가슴 속에 꽁꽁 숨어 있던 야구에 대한 열정은 갈수록 커져만 갔다.
"외국 생활에 적응하려다 보니 잘 몰랐는데, 한국 야구를 꾸준히 보고 사회인 야구까지 접하게 되면서 야구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인들 연락을 받다보니 자꾸 생각이 나요. 힘든 시기를 지나고 어느 정도 여유를 찾고 나니 '천상 야구인은 야구 판으로 돌아가야 하는구나' 라고 생각했죠."

◆ 8년간의 이방인 경험, 국내 첫 다문화 야구단 감독 '밑거름'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점차 커져가던 그때, 양준혁 야구재단에서 다문화 야구단의 감독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호주에서 8년간 이방인 생활을 하며 느꼈던 다양한 경험들은 고스란히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자산이 됐다. 더없이 알맞은 역할과 좋은 취지에 그는 흔쾌히 감독직을 수락하고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곳은 경계가 없어요. '너는 피부색이 왜 이래?'라고 묻지도 않죠. 다른 문화를 가졌어도 서로를 인정하고 더불어 살아가요. 제가 다문화 사회에서 지냈기 때문에 알게 되는 것들이 많았죠. 이곳의 아이들에게 운동 뿐 아니라 다른 것들도 도와야죠. 많은 아이들과 이야기해보고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만들어주고 싶네요."
마음속으로 그렸던 녹색 그라운드 복귀가 이뤄진 지금, 그의 표정은 더없이 밝았다. 사소한 일이라도 팬들로부터 받았던 사랑을 그대로 돌려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마다않겠다고 다짐했다. 오랜 시간 야구계를 떠나 있던 만큼 야구계를 바라보는 애정 어린 시선은 더욱 빛났다.
"원대한 목표보다도 야구계에서 어떤 일이든지 도움을 주고 싶어요. 유소년 야구부터 프로 지명을 못 받는 선수들에게도 도움을 준다든지 여러 가지가 있겠죠. 저를 좋아해주셨던 팬들에게 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야구계를 떠나 있던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지금 저에게 주어진 시간은 정말 소중한 시간이에요."
<글 - 유성현 기자, 사진 - 노시훈 기자>
더팩트 스포츠기획 취재팀 기자 yshalex@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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