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없는 ‘데이터 독립’은 혁신인가, 비용의 늪인가

[더팩트 | 이영규 전문기자] 한국 프로야구가 사상 초유의 흥행 기록을 써 내려가고 있다. 경기장마다 가득 찬 팬들의 함성은 리그의 밝은 미래를 약속하는 듯하며, KBO 역시 ‘연 관중 1,000만 시대’라는 금자탑에 고무되어 있다. 자연스럽게 시선은 산업화로 향했고, 그 핵심에는 데이터가 있다. 야구는 곧 기록의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야구의 역사는 기록의 힘으로 유지된다. 안타 하나, 실책 하나에 담긴 숫자들이 모여 40년 한국 프로야구의 역사를 이뤘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최근 KBO는 ‘자체 기록 입력·전송 시스템 개발’ 입찰 시행 공고를 냈다. 하지만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화려한 겉모습과는 대조적인 행정적 불안감이 읽힌다. 현재의 호황을 산업화 능력의 결실로 오독한 나머지, 20년 넘게 공들여온 데이터 생태계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는 우려가 깊어진다.

◆내재화, '방향'이 맞다고 '준비'까지 된 것은 아니다
KBO가 내세우는 명분은 외부 용역업체 시스템에 의존하던 공식 기록의 입력·가공·전송 업무를 자체 시스템으로 전환하는, 이른바 ‘내재화’다. 데이터 주권을 확보하고 독자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구상하겠다는 전략 자체는 시대적 흐름상 타당하다. 그러나 진정한 내재화는 단순히 데이터를 소유하는 것을 넘어, 이를 운용할 정교한 설계도와 지속 가능한 예산 구조가 전제되어야 한다.
지난 20여 년간 기록 전산화와 운영 관리를 말 그대로 외부 업체에 사실상 무상으로 맡기며 행정의 빈틈을 채워온 KBO가 이제 와 민간 파트너가 구축한 자산의 결실을 독점하고자 '주권'을 외치는 모습은 그저 '준비 없는 홀로서기'로 비친다. 플레이가 데이터가 되고, 그 데이터가 시장에서 가치를 인정받기까지 필요한 정교한 검수 공정과 인프라 운용 노하우는 단기간의 시스템 구축만으로 대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제대로 된 설계도 없이 벽돌부터 쌓겠다고 덤비는 격이다.

◆‘왜(Why)’와 ‘어떻게(How)’가 빠진 내재화
물론 내재화 자체가 악(惡)은 아니다. 오히려 KBO가 직접 데이터를 통제하고 이를 활용해 독자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하는 것은 스포츠 산업의 거대한 흐름인 '직접 서비스(D2C)' 측면에서 반드시 가야 할 길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왜'와 '어떻게'가 빠졌다는 점이다.
진정한 내재화는 단순히 입력 시스템을 직접 만드는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데이터를 가공해 팬들에게 어떤 경험을 선사할지, 어떤 수익 구조로 리그의 자생력을 키울지에 대한 '그랜드 디자인'이 선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KBO의 행보는 20년 노하우를 가진 파트너를 밀어내고, 그 빈자리를 정부 지원금 1년짜리 용역 사업으로 채우려는 '행정 편의주의'에 가깝다.
◆‘무상 헌신’을 ‘권리’로 착각하는 단견
지난 2000년, 수기 기록에 의존하던 KBO 리그에 전산화의 씨앗을 뿌린 것은 스포츠통계 전문업체 스포츠투아이였다. 이들은 20여 년간 시스템 구축부터 운영, DB 관리까지 사실상 KBO가 감당해야 할 행정적 부담을 무상으로 떠안으며 기록 선진화를 이끌어왔다.
하지만 지금 KBO와 구단들은 "왜 우리 데이터를 남이 가져가 사업을 하느냐"는 단순 논리에 함몰되어 있다. 데이터 생성에 필요한 정교한 인프라와 전문 인력의 암묵지에 대한 이해는 어디에도 없다. 오랜 파트너십을 '내재화'라는 미명 하에 헌신짝처럼 버리려는 모습에서 비즈니스의 기본인 '신뢰'는 찾아볼 수 없다.

◆예견되는 ‘관리의 늪’
KBO가 탐내는 '공식 기록(클래식 데이터)'은 역설적으로 현재 시장에서 그리 큰 상업적 가치를 갖지 못한다. 현대 야구 비즈니스의 요체는 트래킹 및 생체 데이터와 세이버메트릭스 등 고도의 가공을 거친 '부가 데이터'에 있다.
민간 업체는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콘텐츠를 개발하며 데이터의 가치를 키워왔다. 그러나 이를 KBO가 직접 관리하겠다는 것은, 혁신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만드는 대신 관리 비용만 떠안는 '비용 센터'로 전락하겠다는 선언과 다름없다. 전문성 없는 내재화는 결국 '업체 의존'의 대상만 바꿀 뿐이며, 시스템 오류와 정합성 붕괴의 책임은 고스란히 KBO의 몫이 될 것이다.
결국 준비되지 않은 내재화는 '관리의 늪'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소유의 만족감은 잠시뿐, 곧이어 닥쳐올 천문학적인 유지보수 비용과 시스템 오류의 책임, 그리고 민간의 창의성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직된 운영은 KBO의 어깨를 짓누르는 짐이 될 것이다.

◆문체부 자금에 의존한 '1년짜리 독립'의 한계
이번 사업이 자체 예산이 아닌 문화체육관광부의 후원금(체육진흥기금)으로 진행된다는 사실은 더욱 우려스럽다. 데이터 10년 대계를 설계한다면서 정부의 단발성 지원 예산에 기대어 사업을 시작하는 것 자체가 전략의 부재를 방증한다.
지속 가능한 고도화 전략 없는 '기금 소진용' 사업은 결국 예산 낭비로 끝날 공산이 크다. 기록 전송 체계가 멈췄을 때 발생할 대혼란을 대비할 플랜 B는 있는가? 내부를 잘 아는 실무관계자들조차 "유착으로 오해받을까 봐" 입을 꾹 닫고 있는 사이, KBO는 출구 없는 미로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지금 프로야구의 흥행은 리그 구성원들의 노력이 일부 밑거름이 되었겠으나, 냉정히 말해 그보다는 여러 외부 요인이 절묘하게 맞물린 '천운'에 가깝다. 이 호황에 도취해 전문 파트너를 배척하고 추진되는 독자 행보는, 머지않아 되돌리기 어려운 운영상의 리스크로 직면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데이터 독립은 파트너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성을 가진 외부 생태계와 상생하며 가치를 키울 때 완성된다. 20년의 신뢰를 저버린 대가가 '기술적 자립'이 아닌 '행정적 재앙'으로 돌아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문체부의 지원금이나 ‘업체 바꿔치기’가 아니라, 한국 야구 기록의 가치를 이어갈 '안목'과 '상생의 결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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