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최정식 선임기자]
구원투수
메이저리그에서 1942년부터 1960년까지를 통합 시대(Integration Era)라고 부른다. 흑과 백으로 나뉘어 있던 야구가 인종적 통합을 이룬 시기이기 때문이다.
1940년대 전반기에는 1백명 이상의 메이저리거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이에 따라 메이저리그 경기의 수준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종전 후인 1947년 재키 로빈슨이 1884년 이후 처음으로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흑인 선수가 됐다.
로빈슨의 데뷔 이후 각 팀은 흑인 선수들과 계약하기 시작했다. 메이저리그에 인종 통합의 시대가 열렸으나 1954년까지는 흑인 선수가 주전으로 나서는 팀이 많지 않았다. 로빈슨이 메이저리거가 된 뒤 10년이 지날 때까지 흑인 선수를 받아들이지 않은 곳도 세 팀이나 됐다.
통합 시대에 두드러진 현상 가운데 하나는 본격적인 구원 투수의 등장이다. 조니 머피, 휴 케이시, 조 페이지 등이 구원 전문 투수들이 소방수라는 새로운 역할로 야구사에 이름을 남겼다.
뉴욕 양키스의 머피는 1935년부터 1943년 사이에 꾸준한 활약을 펼쳤는데 선발로 등판하는 경우가 드물었고, 패전 처리로 나서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최초의 '구원 에이스'라고 부를 만하다.
1944년 데뷔한 페이지는 처음에는 선발투수였다. 1946년부터 선발과 구원을 겸업했고, 전략의 대가인 케이시 스텡걸 감독이 부임하면서 본격적인 구원투수로 나섰다. 1949년부터 1960년까지 양키스를 지휘한 스텡걸 감독은 투수진 운용에 구원투수의 개념을 도입했고 페이지는 그 휘하에서 구원투수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를 입증했다.
스텡걸 감독 부임 첫해인 1949년에 페이지는 63경기에 구원으로만 등판해 13구원승 27세이브를 기록하며 세이브 부문 아메리칸리그 1위에 올랐다. 그러나 공식 타이틀은 아니었다. 세이브가 공식적인 통계로 인정된 것은 1969년부터였다. 스텡걸 감독의 새로운 시도가 페이지의 활약으로 성공을 거두자 다른 팀들도 양키스의 뒤를 이어 리드를 지켜줄 구원투수 확보에 나서게 됐다.
구원투수의 역할이 중요해지면서 19세기에 90%에 달했던 선발투수의 완투 비율은 통합 시대에 37%로 떨어졌다. 한 시즌에 선발로 25경기 이상, 구원으로 10경기 이상 출장한 스윙맨의 비율은 1930년대에 13.1%였으나 1940년대에는 4.2%에 불과했다. 선발과 구원의 역할 분담이 뚜렷해진 것이다.
메이저리그 초창기에는 부상이나 질병이 아니면 선수 교체가 허용되지 않았다. 투수를 교체하려면 그라운드에서 뛰고 있는 다른 야수와 포지션을 바꿔야 했다. 1889년에야 규칙이 바뀌어 선수 교체가 가능해졌다.
그러나 선발투수가 완투하지 못하는 것을 불명예처럼 여겼기 때문에 구원투수의 비중은 크지 않았다. 선발투수가 더 이상 던질 수 없게 되거나 패전처리가 필요할 경우 마운드에 서는 투수는 대부분 선발투수로 실패한 선수들이었다.
누구도 구원투수 역할을 맡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중요한 경기에서 구원이 필요할 때는 팀에서 가장 뛰어난 투수가 나섰다. 데드볼 시대의 스타 투수들인 크리스티 매튜슨, 모데카이 브라운, 에드 월시 등은 시즌 중 최소한 몇 번은 구원투수의 역할도 맡았다.
1908년에는 매튜슨과 브라운이 각각 5개의 세이브로 리그 공동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1930년대까지도 선발투수들이 구원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다. 1930년 레프티 그로브는 선발로 32경기, 구원으로 18경기에 등판해 5구원승과 9세이브를 마크했다. 디지 딘은 1936년 17번 구원등판해 2승 17세이브를 올렸다. 물론 선발로도 34경기에 출장했다.
이처럼 구원투수의 역할은 실력이 처지는 투수가 맡았고 꼭 이겨야 하는 경기에는 에이스가 등판했다. 그런데 1920년대 들어 재능 있는 일부 투수들이 구원으로 주로 등판하기 시작했다. 워싱턴 시네이터스 투수 프레드 마버리는 1924년 월드시리즈에서 승부가 결정되는 경기 종반에 등판해 긴장감 넘치는 상황을 연출하며 구원투수로는 처음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마버리가 1926년 기록한 22세이브는 23년 뒤 페이지가 27세이브를 올릴 때까지 한 시즌 최다로 남아있었다.
1950년대의 구원투수들은 선발투수와 차별화하기 위해 낯선 구종을 무기로 삼는 경우도 있었다.호이트 윌헬름은 너클볼로 이름을 날렸고 로이 페이스는 포크볼로 유명했다.
구원투수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그들의 성적에 대한 평가도 이전과 달라졌다. 1950년 74경기에 구원등판해 16구원승과 22세이브를 올린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짐 콘스탄티는 내셔널리그 MVP로 뽑혔다. LA 다저스의 래리 셰리는 1959년 월드시리즈 MVP의 영예를 안았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마이크 마셜(1974년), 스파키 라일(1977년), 브루스 수터(1979년) 등 사이 영 상을 수상하는 구원투수들이 잇따라 나왔다.
1985년에는 윌헬름이 구원투수로는 처음으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1970년대 후반부터 프리에이전트 시대에 접어들면서 구원투수들의 몸값도 치솟았다. 좌우 타자에 대응해 좌우 투수를 기용할 만큼 중간계투가 전문화되고 1이닝 마무리가 자리잡는 등 마운드의 분업화가 이루어지면서, 짧은 시간에 자신의 전력을 쏟아부을 수 있는 구원투수는 타자의 가장 강력한 적으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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