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랩핑 속에 감춰져 있던 지코의 따뜻한 속내
[더팩트ㅣ정진영 기자]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어쩔 수 없이 사람을 대할 때 편견이 생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카테고리를 대입시키고 그 가운데 하나에 넣는 일이 자주 반복된다. '누구를 진득하게 알아가기엔 너무 바쁜 생활'이란 변명이 뒤를 따른다.
그룹 블락비의 멤버 지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엄청난 애정이나 관심이 없기에 알고 있는 몇 가지 정보를 조합시켜 만든 이미지가 있었다. 특히 엠넷 '쇼 미 더 머니'에서 보여준 자유분방한 이미지와 블락비 및 솔로곡에서 만날 수 있었던 강렬한 랩핑이 큰 영향을 줬다. 왠지 거칠고 무섭고 허세 있을 것 같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서울 이태원 스트라디움에서 열린 지코의 첫 번째 솔로 미니앨범 '갤러리'의 음악 감상회로 향했다.
그에 대한 편견을 깨뜨린 첫 번째는 노래였다. 본격적인 감상회가 시작되기 전 장내에는 '갤러리' 수록곡들이 조용히 흘러나왔다. '날'이 나오기 시작했을 때 한 구절이 귀를 사로잡았다. '경고했어. 내 팬들 향해서 빠순이라 나불대면 뒈져.'
이 건 '빠순이'(오빠와 순이를 합친 말. 모든 일을 제쳐두고 운동 선수, 가수, 배우 등의 유명인을 쫓아다니면서 응원하는 여성을 속되게 일컫는 말, 여성 팬들을 비하하는 의미로도 쓰임)라면, 혹은 '빠순이'였다면 무조건 감동할 수밖에 없는 말이다. 과거 록밴드 림프비즈킷의 멤버 프레드 더스트가 "슬립낫 팬들은 하나 같이 다 뚱뚱하고 못생겼다"는 말을 했는데 이에 대해 슬립낫의 멤버 코리 테일러가 "다시 한 번 우리 팬들에 대해 입방정 떨면 죽여버리겠다"고 응수한 적이 있다. 슬립낫의 '빠순이(?)'로서 무척 감동받았던 기억이 난다. '날'은 순간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지코의 랩이 거칠어도 내용은 그렇지 않나 보다'란 생각이 들었다.
음악 감상회에서 지코는 시종일관 진지했다. 어떤 질문에도 건성으로 대답하지 않고 고민한 뒤 입을 열었다. 그가 무척 조심스럽고 팬들을 위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지드래곤과 관련된 질문이 나왔을 때였다.
아이돌 그룹 출신이면서 동시에 프로듀싱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음악성을 드러내고 수준급 랩 실력을 갖춘 두 사람은 예전부터 종종 비교가 되곤 했다. 이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지코는 "(지드래곤과) 음악적인 장르가 겹치는 게 하나도 없다. 내가 지드래곤 선배를 따라했다고 하는 분들이 많은데 나는 그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국내에서 최정상에 있는 아티스트와 비교를 해주시는 건 무척 좋다"고 설명했다.
여기까진 예상할 수 있을 법한 대답이었는데 이 뒤에 덧붙인 말이 의외였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그런데 지드래곤 선배의 팬 분들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 같진 않다. 내 행보를 좋지 않게 보시는 분들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그런 말에 동요하지 않고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팬덤 사이의 감정 싸움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의지가 엿보였다.
음악 감상회가 끝난 뒤 근처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점심 시간 전에 시작해서 끝날 때쯤 마친 행사에 배고팠을 취재진을 위해 식사 대접을 하겠다는 취지였다. 보통 이럴 땐 취재진과 소속사 관계자 몇 명만 있게 마련인데 곧 지코가 들어왔다. 그는 테이블을 돌며 "바쁜데 찾아와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한 뒤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얘기를 하며 밥을 먹는 지코의 뒤통수를 보고 있자니 거친 랩핑도 날선 가사도 잊혀졌다.
다음 일정이 있어 서둘러 식당 밖으로 나가다 소속사 관계자와 서서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마침 어딘가를 다녀왔던 모양인지 다시 식당으로 들어서던 지코가 우릴 발견한 모양이었다. 그는 일면식도 없는 필자에게 다가와 "늘 감사하다. 오늘 와주셔서 고맙다"며 다시 한 번 인사를 건넸다. 대단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 성의가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또 한 번 편견이 깨졌다. 기대하지 않았기에 더욱 의외였던 지코의 인간미는 '얘는 이럴 것이고, 쟤는 저럴 것이다'는 편견이 참 의미 없는 일이라는 걸 깨닫게 했다.
"결국 '날' 음원을 다운. 이런 게 '팬아저'(팬 아닌데 저장)라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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