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최정식 선임기자] 2001년 8월 프로농구팀 서울 삼성은 미국 포틀랜드에서 전지훈련을 했다. 2000-2001시즌 챔피언 삼성의 간판스타는 주희정이었다. 포인트가드로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플레이오프 MVP로 뽑혔고 연봉도 1억7500만원으로 팀에서 가장 많이 받았다.
그런 주희정이 전지훈련지에서는 '빨래 당번'이었다. 당시에도 프로선수들이 세탁물에 비누를 비벼가며 직접 세탁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숙소에서나 지방원정 때는 물론이고 외국에 나가서도 빨랫감을 방문 앞에 내놓기만 하면 됐다. 그런데 포틀랜드는 사정이 달랐다. 선수단이 묵는 호텔에 세탁서비스가 없어 하나뿐인 세탁기를 사용해야 했다. 날마다 산더미처럼 쌓이는 선수단 전체의 빨랫감을 나이가 어린 다섯 선수가 처리했는데 그 가운데 한 명이 주희정이었다.
그때 주희정의 나이는 스물다섯. 1997-1998시즌에 데뷔했지만 프로농구가 출범할 때 비록 연습생이었지만 원주 나래 선수로 등록된 '원년 멤버'였다. 대학을 졸업하지 않고 프로에 일찍 뛰어들었기 때문에 동갑내기들보다 입단시기가 앞섰다. 사실상 다섯 시즌을 소화했으니 프로에서 선참으로 통할 법도 했지만 나이가 어렸다.위계질서를 중시하는 분위기에서 운동을 해왔기 때문에 주희정은 자정이 넘도록 세탁기를 돌리고 세탁물을 배달한다든가, 체육관에 도착해 가방에서 볼을 꺼내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프로 경력보다는 나이가 우선이었다.
이듬해 1월 주희정은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을 겪었다. 프로농구스타로 성장하기까지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 김한옥씨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임종을 못했다. 올스타로 뽑혔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휴가기간이었기 때문에 할머니가 병상에 누워 있는 부산으로 달려갈 수도 있었다. 일시적으로 병세가 호전됐던 터라 올스타전을 치른 뒤로 미뤘던 것이다. 올스타전을 하루 앞둔 날 아침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부산으로 향했지만 가는 도중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눈물을 뿌려야 했다.
주희정은 어릴 때부터 할머니와 단둘이 힘들게 살았다. 어려운 환경 때문에 대학을 중도에 포기해야 했고 할머니는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가족이었다. 남들보다 일찍 프로에 뛰어든 것도 갖은 고생을 다하며 자신을 뒷바라지한 할머니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프로에 들어왔지만 무명 선수였다. 1997-1998시즌 개막 직전 부상을 당한 이인규 대신 주전 가드로 기용돼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신인상을 받았지만 신기성이 입단하면서 삼성으로 트레이드됐다. 그가 이를 악물고 뛰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할머니를 모시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절실함 때문이었다.
2003-2004시즌 초반 주희정의 3점슛이 호조를 보였다. 그의 치명적인 약점이 3점슛이었다. 그의 외곽슛이 워낙 좋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가 그를 놓아두고 다른 선수에 대한 도움 수비를 들어가는 일이 잦았다. 이럴 경우 포인트가드로서 팀의 공격이 제대로 안 되는 것도 문제가 되지만 동료들에게 폐가 되고 있다는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에게 3점슛이 좋아진 이유를 묻자 "(서)장훈 형이나 데릭 존슨이 리바운드를 잡아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자신있게 던질 수 있다"고 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가 약점을 개선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한국 남자농구에서 슈터로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선수로 꼽히는 신동파씨는 "슈터로서 성공하는데 100이 필요하다면 그 가운데 55는 천부적인 자질, 45는 후천적인 노력"이라고 했다. 슈팅에는 자질이 필요한데 그것이 부족하다면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이후에도 한동안 3점슛은 그의 아킬레스건이었지만 결국 그는 노력으로 그 약점을 떨쳐냈다.
16일 주희정이 은퇴를 공식 발표했다. 국내 프로농구 최초로 1천 경기 출전의 기념비를 세우며 모두 1천29경기에 나섰다. 불혹에 이르기까지 20년 동안 코트에 나서지 않은 것은 단 15경기다. 출전 외에 통산 어시스트(5천381개)와 스틸(1천505개)도 1위에 올라 있다. 오랫 동안 그를 괴롭혔던 3점슛도 2위다. 득점과 리바운드 등 블록슛을 제외한 주요 통산 기록 5걸 안에 모두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오래 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프로농구 역사에 남을 만한 활약을 펼친 것이다. 물론 그랬기에 오래 할 수 있었겠지만.
주희정이 선수로서 프로농구에 남긴 것은 숫자가 아니라 열정이다. 그 열정이 이제 그가 바라보고 있는 지도자의 길에서도 뜨겁게 타오르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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