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투기의 인기가 날로 높아지고 있다. UFC를 비롯해 지금은 종영된 과거 '낭만 주먹'들의 사랑과 의리를 담은 드라마 '감격시대'까지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한 시대를 호령했던 '전설의 파이터'들이 떠오르는 요즘, 이들에 대한 기억은 무심하게 흐르는 세월 탓에 머릿속에서 잊혀지고 있지만, 그들이 남긴 명장면들은 여전히 기억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다. 이따끔씩 그 시절의 '추억'을 회상할 때면, 어깨가 절로 들썩이고, 삼삼오오 모인 술 자리에선 그들의 명승부가 최고의 안줏거리를 대신 하기도 한다. 파이터의 혼이 실린 펀치와 킥 등이 지금까지 팬들에게 쾌감과 감동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더팩트>은 누군가의 영웅이자, 꿈이기도 했던 파이터들의 이야기를 '전설의 주먹' 코너를 통해 다시 꺼내본다. <편집자 주>
[박상혁 기자] 양발을 앞뒤로 흔들며 춤을 추는 듯한 경쾌한 스텝, 만화에서나 볼 수 있는 풍차 회전 후 상대에게 날리는 오른손 훅, 그리고 때릴 테면 때려보라는 식으로 상체를 내밀고 상대의 펀치를 유도하는 심리전까지. 이 세 가지를 모두 겸비했던 전설의 복서를 기억하는가? 만약 기억한다면 당신은 진정한 복싱 마니아다. 이런 상상 속에서나 존재할 법한 캐릭터의 복서가 누구일까? 바로 역사상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꼽히는 슈거 레이 레너드(57)가 그 주인공이다.
레너드는 순발력이 뛰어났고 양손을 모두 잘 사용했다. 특히 '현란한 풋워크'는 따라갈 선수가 드물었다. 또한 영리한데다 기회 포착에도 능해 승부처에서의 폭발력도 대단했다. 쇼맨십도 갖추고 있었고, 경기마다 상식을 뛰어넘는 운동 능력까지 펼쳐보이며 팬을 매료시켰다. 하지만 단순히 쇼맨십만 있는 선수라 여기면 곤란하다. 아마 시절 전적이 150전 145승 5패, 프로 전적은 40전 36승1무3패였다. 프로 5개 체급에서 타이틀을 획득했고, 현역 시절 프로 챔피언들이 꼽은 최고의 복싱 챔피언 1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무하마드 알리가 2위에 그쳤을 정도니, 레너드의 당시 존재감을 느낄 수 있다. 이런 레너드를 '전설의 주먹' 코너 5번째 주인공으로 선정했다.
◆ 작은 주먹에 희망을 담다
레너드는 1956년 5월 17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윌밍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레이 찰스 레너드다. 슈거 레이 레너드라는 이름은 후에 레너드가 자신이 존경하던 복서 슈거 레이 로빈슨의 이름을 쓰면서 생겨났다. 로빈슨의 이름을 쓰면서 '슈거'라는 별명을 갖게 됐는데, 이것은 그의 아내가 권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대부분의 흑인 복서들이 겪는 필연적인 환경일지 모르지만, 그의 어린 시절도 불우했다. 가난한 빈민가에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가정 폭력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당시만 해도 제대로 된 고등교육을 받지 못하는 빈민가의 흑인들이 성공할 길은 갱이 되거나 운동을 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 역시 믿을 수 있는 것은 맨주먹뿐이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던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레너드는 미국 아마추어 복싱계에서 군계일학의 경기력을 보였고, 약관의 나이에 올림픽 대표가 되기에 이른다.
◆ 몬트리올 올림픽, 'KO 아티스트를 KO로 꺾다!'
레너드는 이미 20살 이전에 아마추어 라이트웰터급을 제패한 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같은 체급 금메달을 따냈다. 몬트리올 올림픽은 그의 아마추어 마지막 대회였다. 미국에서 승승장구하던 그였지만 올림픽을 바라보는 시선은 달랐다. 아무리 레너드라도 좋은 성적을 내기 힘들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특히 라이트웰터급은 당시 쿠바의 슈퍼스타이자 'KO 아티스트'라 불리던 안드레스 알다마가 우승할 것이라는 전문가의 예상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레너드는 이런 주위의 시선에도 조금의 동요 없이 차분히 경기를 풀어갔다. 한 라운드, 한 라운드 침착하게 상대의 허점을 노리던 레너드는 마지막 라운드에서 펀치를 폭발하며 알다마를 5-0 심판 전원 일치 판정으로 꺾었다. 몬트리올 올림픽 금메달로 아마추어 시절 정점을 찍은 그는 곧바로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후 그의 선택은 프로 진출이 아닌 대학 진학이었다.
◆ 경기력과 스타성을 갖춘 최고의 스타
몬트리올 올림픽을 통해 레너드는 검증된 복서로 거듭났다. 빼어난 경기력을 기본으로 스타성과 상업성까지 갖춘 그를 향한 프로모터들의 적극적인 구애가 끊이지 않았다. '레너드를 링에 올리기만 해도 대박'이라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이런 제안들을 거절하고 결국 메릴랜드 주립대에 입학했다. 혹자들은 대학 진학을 대전료와 몸값을 올리려는 레너드의 '베팅'으로 보기도 했다. 결과론적으로 레너드가 경제적 어려움과 아버지의 병환을 이유로 은퇴 번복 후 1977년 2월 프로에 데뷔했으니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얘기는 금방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혔다. 사실 여부를 떠나 천재적인 복서가 프로 무대에 데뷔한다는 기대감이 컸기 때문이다. 그의 첫 대전료가 4만 달러(약 4155만원)로 당시 신기록이었으며, 신인 선수의 데뷔전을 CBS가 전국에 생방송 했다. 그의 인기와 지명도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프로 데뷔전 승리 이후 레너드는 승승장구하며 무려 25연승을 달렸다. 1979년 마침내 세계 챔피언에 오를 기회를 잡게 되는데, 상대는 천재 복서로 알려진 윌프레드 베니테스였다. 대표적인 기교파 복서였던 두 선수는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맞섰고, 결국 체력이 달린 베니테스를 레너드가 마지막 15회에 눕히고 챔피언에 올랐다. 이후 그의 프로 통산 전적은 40전 36승(25KO) 3패 1무승부. 링 위에서 그는 넘어진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복싱 천재'였다.
◆ 슈거 레이 레너드 현역 시절 하이라이트 영상(www.youtube.com/v/tobeGwAOTZw)
(하)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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