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일 기자] "인간극장에 출연했던 그 꼬마 축구 소년이 벌써 이렇게 컸어?"
김귀현(21)을 만났을 때 처음 든 생각이었다. 14살의 어린 나이에 '아르헨 드림'을 꿈꾸며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그가 어엿한 청년이 돼서 돌아왔다. 축구를 생의 의미로 받아들였고, '간절함'이라는 요소가 더해져 삶의 지향점에 한 걸음, 한 걸음 더 다가갔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덧 타국 생활 6년 만에 한국인 최초 '아르헨티나 프로축구 1부리그' 선수로 우뚝 섰다.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그가 지나온 시간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격렬했고 특별했다. 그리고 2011년을 맞이하기 전까지 밟아온 삶의 궤적도 이채롭기는 마찬가지. 쟁쟁한 남미 선수들 틈에 끼어 당당히 주전 경쟁을 펼치며 유쾌한 도전을 마다하지 않았던 의지의 청년은 오늘 우리에게 또 하나의 '슈퍼 탤런트'로 이름을 내밀고 있다.

▲ 청각장애 부모님…"나를 키운 건 8할이 외삼촌이었다"
"귀현이요? 천운(天運)을 타고 난거죠."
휴가차 한국을 방문한 김귀현을 12일 서울에서 만났다. 그의 옆에는 든든한 버팀목이자, ‘김귀현’이라는 존재를 완성시킨 주역으로 유명한 외삼촌이 동행했다. 그리고 ‘천운’이라는 뼈있는 한 마디만 남긴 채 자리를 떠났다.
"(외삼촌은) 어린 시절부터 항상 제 옆에 계셨죠. 주변 사람들도 놀라요. 자기 자식도 이렇게 못 키우는데 저를 그 이상으로 대했으니까요."
김귀현의 외삼촌은 청각장애를 앓은 부모를 대신해 조카를 뒷바라지했다. 주변에서는 "김귀현 아버지, 그 이상의 존재"로 불렸다.
"부모님이 청각장애를 겪다 보니까 외삼촌이 오해를 사신 적도 있어요. 특히 저를 아르헨티나로 보내려고 하셨을 때, 어머님은 외삼촌이 저를 강제로 보내는 줄 아셨나 봐요.(웃음) 물론 지금은 그 뜻을 이해하셨고, 좋아하시죠."

축구선수 출신인 김귀현의 외삼촌은 누구보다 그의 재능을 눈여겨봤다. 그리고 강도 높은 훈련으로 기본기를 지도했다. 당시를 회상하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지금의 알찬 성장은 외삼촌의 '장인(匠人)' 손길이 담겨진 하나의 완성품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육상을 시작했어요. 당시 지역의 한 체육중학교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올 정도로 소질을 보였죠. 하지만 외삼촌은 축구 선수의 길을 원하셨어요. 그러던 중 외삼촌이 선수 시절 때 인연이 된 지인을 통해 저를 남해스포츠파크로 데려갔어요."
▲ "짜식, 좀하는데?" 삶의 '세렌디피티' 아르만도를 만나다
"음, 6학년이요? 너무 늦었는데…3개월 정도 테스트해보죠."
김귀현이 축구를 통해 구체적인 꿈의 로드맵을 그릴 무렵, 늦은 시기에 입문한 그를 두고 현지 코칭스태프는 '3개월'이라는 조건만 내건 채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나 그 '3개월'이라는 시간은 김귀현에게 '간절함의 미학'을 알려준 첫 번째 공간이었다. 또, 아르헨티나 출신의 아르만도 감독은 김귀현의 삶에 있어 결정적인 '세렌디피티(serendipity)'가 됐다.
"외삼촌은 네가 하는 것에 모든 것이 달렸다고 하셨죠. 처음에는 체력 훈련도 못 따라가고 뒤처졌어요. 그래도 외삼촌과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죽을 힘을 다했죠. 너무 힘들었지만 간절했어요. 그리고 마침 일주일 만에 대구 지역 한 초등학교 팀과 시합을 했는데 제가 두골을 넣었어요. 경기 후 아르만도 감독님이 선배들한테 일주일 된 놈보다 어떻게 더 못하냐고 혼내시더라고요.(웃음)"
단 일주일의 짧은 기간, 김귀현은 아르만도 감독의 눈도장을 확실히 받았다. 선배들보다 더 역동적인 움직임과 활약으로 금세 주전으로 도약했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김귀현의 발목을 잡은 것은 어려운 가정형편이었다. 그 때 역시 김귀현의 존재가치를 꾸준히 유지시켜준 주인공은 ‘외삼촌’이었다. 외삼촌은 30대가 넘은 나이에도 손수 우유배달을 통해 김귀현의 축구 교육비를 조달할 정도로 애정을 보였다.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 뿐이었죠. 외삼촌이라는 존재가 저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더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어요. 철도 많이 들었고요."
'열정과 집념'을 갖춘 그에게 아르만도는 애정의 '채찍'을 가했다. 그리고 그 '채찍'이 계속될수록 김귀현은 나날이 성장했다. 또다시 갈림길이 찾아왔다. 중학교 2학년 시절인 2004년, 아르만도 감독은 남해스포츠파크와 계약을 마쳤다. 더 이상 가르칠 수 없는 김귀현에게 아르헨티나 진출을 권유했다.
"당연히 고민했죠. 처음에는 안 가려고 생각했지만 외삼촌께서 아르만도 감독을 전폭적으로 신뢰했기에 건너갈 것을 권유하셨어요. 물론 제 의지가 가장 중요했죠. 오랜 시간 생각했지만 결국 가자는 마음을 갖게 됐죠."

▲ 아르헨티나 생활…"슈퍼스타K 못지 않은 서바이벌 게임"
낯선 땅, 낯선 기후. 14살 김귀현에겐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그러나 축구에 대한 열정은 낯선 환경을 이겨내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한국에서 인연을 맺은 아르만도 감독의 배려로 그의 집에서 숙식까지 해결하며 축구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운동을 많이 한 상태여서 몸이 좋았어요. 마침 아르헨티나 프로구단별로 유스 테스트 기간이었죠. 그리고 우연히 벨레스 사르스필드에 합류했죠. 그런데 경쟁이 워낙 치열했어요. 최초 8개팀으로 나뉘어 시합을 하고, 나중에는 4개팀으로 좁혀요. 그리고 또 2개팀으로 좁히죠. 거의 서바이벌이었어요. (‘슈퍼스타 K’ 같은 느낌이네요?) 그렇죠.(웃음) 최종 1개 팀은 실제 벨레스 소속 유스팀과 또 경기를 치러요. 그리고 그 안에서 다시 포지션별로 능력을 확인하는거죠. 결국 벨레스 유스팀 공석이 3명이었는데, 운 좋게 제가 뽑혔어요."


김귀현은 2005년 벨레스 사르스필드 14세 이하 유스팀에 입단했다. 수백 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170cm 단신에 우월한 체격도 아닌 낯선 동양인 한명이 당당히 '최후의 3인'에 선발됐다.
그후 각 연령대별 유소년 팀을 거치며 차곡차곡 기량을 쌓았다. 어린 나이에 별도의 보호자없이 오랜 타향살이에 지칠 법도 했지만 그는 '청각 장애인' 부모님과 자신의 '분신'인 외삼촌, 그리고 한국에서 배운 '간절함'의 미학을 되새기며 그라운드를 누볐다.
"처음 6개월 동안 경기를 못 뛰었어요. 미성년자 신분이라서 보호자가 아르헨티나에 없으면 비자를 못 내준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구단 변호사가 신경을 많이 써줘서 잘 해결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6개월 만에 지역 라이벌팀 경기서 데뷔전을 치렀죠."
아르헨티나의 푸른 잔디는 냉정했다. 공식 경기에 처음 발을 내딛자마자 보이지 않는 차별과 부딪혔다. 피지컬도 그리 뛰어나지 않고 현란한 기술을 갖춘 것도 아닌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오직 '냄새 나는 동양인'이었다. 패스도 주지 않고 온갖 조롱과 비난을 가했다. 그러나 김귀현은 오히려 그것을 또 하나의 흥미요소로 받아들였다. 그럴수록 무서운 집념으로 동료가 '스스로 패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차별에는 오직 '실력'으로 대응했다.
결국 김귀현은 각 유스팀을 거치며 대부분 경기에서 선발 출전은 물론, 2009년 1월 아르헨티나 진출 5년 만에 2군 주장까지 차지하는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다.

▲ '깜짝 태극마크'…낯선 동료, 낯선 문화에 따른 '아픈 상처'
그의 성장은 비단 아르헨티나 현지에서만 빛난 것은 아니었다. 한국 축구계에도 자연스레 전해져 지난 2008년 조동현 감독이 이끌던 19세 이하(U-19) 청소년대표팀에서 김귀현을 호출했다. 그러나 이 순간은 그에게 가슴 아픈 추억의 한 조각이 됐다.
"시즌을 마치고 휴가 중이어서 몸 상태가 완벽치가 않았어요. 그래도 영광스러운 자리인데 무조건 가야겠다고 생각했죠."
왠지 모르게 낯설었다. 워낙 어린 시절 타지로 떠났기에 아는 동료도 없었고 그들의 문화도 익숙치 않았다. 마치 처음 아르헨티나 땅을 밟았을 때처럼 어색한 단추를 낀 것 같았다. 결국 불안한 감정은 뜻하지 않는 사태로 이어졌다.
"연습 경기 도중 상대 선수와 무릎을 부딪쳤어요. 처음에 '뚝'하는 소리가 났는데 '별거 아니겠지'하고 경기를 계속했죠. 그런데 부분 인대 파열이었어요. 한숨이 났죠."
그렇게 김귀현은 씁쓸히 대표팀을 떠났다. 태극마크를 놓친 것 보다 다른 동료와 이질감을 느꼈다는 아픔과 소속팀으로 돌아가 재활을 해야 한다는 미안함. 그 모든 것이 김귀현의 첫 번째 '태극마크'는 아픔으로 남게 했다.
"차라리 그 당시 대표팀에 뽑히지 않았으면 어땠나 싶어요. 운동 선수가 쉬고 있는 상태에서 갑자기 무리를 하는 것은 부담이 돼요. 당시 부상을 당하면서 여러가지 아픔이 있었죠. 그래도 다행히 빠르게 회복돼서 3개월 만에 경기장에 복귀 할 수 있었어요."
▲ '달콤한 유혹' 이겨낸 아르헨 1군 계약…"꿈은 이루어진당께"
다시 아르헨티나 이야기를 꺼냈다. 1군 계약을 맺었을 당시 심정을 묻자, "솔직한 심정으로 당시 괴로웠습니다"라고 말해 궁금증을 낳았다.
"당시 K리그 1개 팀, 중국 슈퍼리그 1개 팀이 정식 입단 제의를 했었어요. 솔직히 이틀 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을 정도로 고민했습니다. 왜냐하면 벨레스와 맺은 3년 계약이 말이 3년이지 정말 큰 고생의 시작이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양국이 좋은 대우를 해주는데 당연히 고민하죠. 그런데 의외로 삼촌과 아르만도 감독님이 제 스스로 선택하라고 하셔서 더 갈등했어요."
한국과 중국 프로팀에서의 제의는 다소 파격적이었다. 아르헨티나서 비교적 성공적인 흐름을 보여준 그에게 주전 자리는 물론, 섭섭지 않은 연봉 조건을 내세워 이적을 권했다. 타향 살이에 지쳤을 법한 김귀현에게는 달콤한 유혹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르헨티나 잔류를 택했다.
"눈 위에서 썰매를 탈 때도 길을 잘 닦아야 뒤에 있는 사람들이 편하고 안전하게 탈 수 있잖아요? 그 개념인거죠. 아시아 선수 중에서 남미 대륙에서 유소년부터 시작해서 성인 1군까지, 누군가 길은 닦아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개척해야 한다. 개척하자. 그거 하나였죠."
간절함을 담아온 길. 그리고 자기 혼자만의 힘이 아닌 청각 장애인 부모님과 외삼촌, 그리고 타국 선수를 아들처럼 보살펴 준 아르만도까지…. 김귀현의 삶의 동력이 된 모든 기억들이 한 순간 다른 환경을 찾기는 어려웠다.
"(후배들에게 이 길을 추천하고 싶어요?) 예, 추천하고 싶죠. 브라질은 70~80%가 기술축구예요. 그런데 아르헨티나는 기술과 체력을 겸비해서 유럽식 축구도 접목됐죠. 이른바 '맛있는 짬뽕'이 아르헨티나 축구입니다."

1월 17일. 김귀현은 다시 아르헨티나로 떠났다. 이제는 당당한 아르헨티나 1부리그 선수로 자신의 최종목표인 '유럽 진출'과 '태극마크'에 대한 꿈을 향해 진정한 시작점에 섰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팬들에게 한 마디를 부탁하자, "팬이라고 하기에 쑥스럽네요.(웃음) 옛날에 '인간극장' 출연한 이후 아직까지 옷가지나 약을 챙겨 보내주시는 분들이 계세요. 너무 감사드리고요. 지금처럼 응원 많이 해주시면 반드시 올 시즌 일내겠습니다. 지켜봐주세요."

<사진 = 김용일 기자, 김귀현 선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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