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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비사㉑ <하>] 5일간 보트피플 신세...월남 극적 탈출

  • 정치 | 2024-12-15 00:00

우여곡절 끝 선박 주선...망망대해로
"냉수 두 잔이 아침 식사" 극악 환경
대만 화물선 도움으로 싱가포르 도착


외교부는 매년 '30년 경과 비밀해제 외교문서'를 공개한다. <더팩트>는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에 따라 월남(남베트남)을 탈출했던 대사관 직원들과 교민들의 철수 과정을 김창근 서기관의 수기를 통해 재구성했다. /임영무 기자
외교부는 매년 '30년 경과 비밀해제 외교문서'를 공개한다. <더팩트>는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에 따라 월남(남베트남)을 탈출했던 대사관 직원들과 교민들의 철수 과정을 김창근 서기관의 수기를 통해 재구성했다. /임영무 기자

외교부는 매년 30년이 지난 기밀문서를 일반에게 공개합니다. 공개된 전문에는 치열하고 긴박한 외교의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전문을 한 장씩 넘겨 읽다 보면 당시의 상황이 생생히 펼쳐집니다. 여러 장의 사진을 이어 붙이면 영화가 되듯이 말이죠. <더팩트>는 외교부가 공개한 '그날의 이야기'를 매주 재구성해 봅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외교비사(外交秘史)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감춰져 있었을까요? <편집자 주>

☞<중>편에 이어

[더팩트ㅣ김정수 기자] 소총을 든 남자가 차 가까이 오더니 여기저기를 둘러봤다. 무슨 일이 나는 건 아닐까. 모자를 푹 눌러쓰려던 찰나 문이 열렸다. 나에게 가방을 열어보라고 했다. 내 옆에 앉아 있는 이에게도 신분증을 내놓으라고 했다. 온몸에 땀이 흘렀다. 그때 무장한 남성들 일행이 차를 보내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 남자는 그대로 돌아섰다. 담배를 물고 쿵쾅거리는 가슴을 달랬다.

이후 여러 검문소를 지났지만 다행히 별일은 없었다. 북베트남군 한 명이 길을 가로막았을 때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지만 히치하이크였다. 그를 태운 덕이었을까. 검문소 통과는 순조로웠다.

태국으로 빠지는 중간 지역 롱하이(Long Hai)에 도착했다. 북베트남군 수십 명이 보인다. 차를 조심스레 몰아 어느 마을 끝자락에 주차했다. 일행 중 한 명이 마을을 둘러보겠다며 차에서 내렸다. 얼마 뒤 돌아온 그는 이 마을에도 피난민 수십 명이 있다고 했다. 그들을 숨겨준 어느 집 주인은 우리에게도 들어와서 몸을 숨기라고 했다. 몇몇은 그 집으로, 나와 나머지 사람들은 차고에 몸을 숨겼다.

새벽녘 배가 주선됐다. 출발 시간은 오전 6시 30분. 적당한 식량을 챙겼다. 배에 올랐다. 이제 믿을 건 우리를 이곳까지 안내한 선원 출신 한국인들. 배에 시동이 걸렸는데 앞으로 나아가질 못한다. 물에서 뛰어내려 배를 밀었다. 이판사판이었다. 드디어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계를 보니 오전 7시였다.

배가 망망대해에 다다랐을 무렵, 선원 출신 한국인들은 선장을 둘러쌌다. 그러더니 당장 배를 태국 방콕으로 몰라고 위협했다. 선장은 '약속이 틀리지 않느냐'는 표정이다. 우리는 강도가 된 셈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배 키를 우리가 잡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저 앞에 희미한 불빛 두 개가 보였다. 배 크기로 봐서는 미 7함대로 보였다. 배에 타고 있던 월남인 선원도 북베트남군 배는 아니라고 했다. 한번 지그재그로 움직여 보고, 우리를 잡으러 온다면 도주해 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하지만 너무 위험한 시도였다.

김창근 서기관의 일지. 목숨을 건 탈출이 지속되면서 한계가 온 듯하다. 그는
김창근 서기관의 일지. 목숨을 건 탈출이 지속되면서 한계가 온 듯하다. 그는 "희미한 생각 속에 가족이 자꾸만 떠오른다"며 "하느님 우리를 살려주십시오. 처음으로 불러본 하느님이다"라고 회고했다. /외교부 제공

갑론을박이 오갈 때 갑자기 엔진 소리가 멈췄다. 이어 '풍덩' 소리가 들렸다. 월남 선원 3명이 동시에 뛰어내린 것. 시동 장비를 들고 뛰어내린 듯했다. 배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동 장비를 찾을 수 없었다. 모두가 절망에 빠졌을 때 바다에 뛰어내린 선원들이 다시 살려달라며 돌아왔다. 이들을 건져서 다시 시동을 걸라고 소리쳤다. 다시 엔진 소리가 들렸다. 희망의 소리, 삶의 소리였다.

5월 4일. 항해하는 동안 여러 척의 배를 봤지만 다가갈 수 없었다. 우리 배의 속도가 느렸던 것도 있고 정확히 어느 국적의 배인지 알 길이 없었다. 언제쯤 육지에 닿을 수 있을까. 아침이 밝아오면서 냉수를 두 잔 마셨다. 그게 아침 식사였다. 아이들 생각에 눈물이 났다. 그래서 더욱 처절하게 살아 남아야 했다. 하지만 굶주림과 뙤약볕에 온몸에 힘이 빠졌다. 하느님에게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살면서 처음 불러본 하느님이었다. 아내가 생각났다. 결혼 후 셋방살이로 고생만 시킨 아내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하루를 간신히 넘겼다.

5월 5일. 주먹구구식 항해를 보내던 중 갑자기 물살이 거세졌다. 고개를 돌려 뒤를 봤다. 큰 화물선이었다. 이제 방법은 없었다. 수건과 담요, 모자 등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흔들고 고함을 질렀다. 화물선은 우리 배 쪽으로 가까이 왔다. 우리는 줄을 던졌고 화물선 선원이 잡았다. 그렇게 화물선으로 올라갔다.

선장과 만났다. 대만 배라고 했다. 천만다행이었다. 선장에게 국적을 밝히고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선장은 우리를 반기지 않았다. 이 배는 미국 측과 계약돼 있어 선원 외에는 아무도 태우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선장의 영어가 신통치 않아 한자와 간단한 영어로 필담을 나눴다. 대만과 한국은 국교를 맺고 있다고 말해줬다. 선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유류와 식량은 충분히 주겠다며 돌아갔다.

이대로 화물선에서 내릴 수는 없었다. 그대로 버티기로 했다. 그때 부선장이 나를 부르더니 보증서를 작성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싱가포르까지 자신들과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재빨리 보증서를 작성했다.

"MING AN호 선장 귀하. 1975년 5월 5일. 본인 하기 상명인은 별첨 명단의 각자로부터 발생하는 문제에 관해 모든 책임을 지겠습니다. 김창근."

부선장이 나에게 쪽지를 건넸다. 쪽지에는 신우(信友)라고 적혀 있었다.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선장과의 갈등은 계속됐다. 어느 날은 인원의 절반을 우리가 타고 온 배에 태우고, 나머지는 화물선에 남아 있으라는 이상한 재촉을 하기도 했다. 부선장은 우리를 도우려 했지만 선장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매번 부정적이었다.

김창근 서기관이 대만 화물선 MING AN호 선장에게 건넨 보증서 내용. /외교부 제공
김창근 서기관이 대만 화물선 MING AN호 선장에게 건넨 보증서 내용. /외교부 제공

5월 7일. 선장이 결국 우리를 쫓아냈다. 싱가포르까지 120마일밖에 남지 않았고, 날씨가 좋으니 이제는 따로 가자는 것이었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선장과 기싸움을 할 여력도 남지 않았다. 화물선에서 내려 다시 우리 배에 올랐다. 화물선이 우리를 앞질러 갔다. 그때 화물선에서 전등불 신호가 들어온다. 신호명은 'I LOVE YOU'. 아마 부선장이 보낸 신호였을 것이다.

5월 8일 새벽 2시경. 먹구름이 몰려왔다. 바람도 심상치 않았다. 번개까지 쳤다. 이대로 끝나는 것일까. 가슴을 졸이며 버티던 사이 웅성이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저쪽을 보라"고 외쳤다. 등대였다. 드디어 육지에 다다른 것이었다. 배를 항구 쪽으로 더 붙였다. 이제는 헤엄쳐 갈 수 있는 거리까지 왔다. 살았다. 싱가포르 항구였다.

경비정 한 대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한 군인이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사이공에서 왔다고 했다. 그러자 피난민 선박이 모여있는 곳으로 배를 돌리라는 것이었다. 아찔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한국 외교관이라고 설명했지만 말이 통하지 않았다. 서로 옥신각신하는 사이 경비정 대장과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주월한국대사관 외교관이라고 소개하고 한국의 싱가포르총영사관과 연결해 달라고 했다. 대장은 내 여권을 살펴보더니 싱가포르 해양경찰본부로 갈 수 있게 해줬다.

싱가포르 해양경찰본부에서도 내 신원을 확인했다. 싱가포르총영사관과 연락이 닿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김창근 : "양세훈 영사. 나 김창근이오. 사이공에서 탈출했습니다."

양세훈 : "김창근 씨...조금만 기다리시오. 곧 갈 것이니."

김창근 : "우선 본부에 알려주고 내 가족에게도 알려주시오."

두 뺨에 눈물이 흘렀다. 책상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해양경찰본부 사람들은 펑펑 울고 있는 나를 보고도 못 본 척해줬다. 영사관 직원이 도착했다. 얼마나 고생했느냐는 표정이었다.

5월 9일. 본부에서 연락이 왔다. 누구와도 접촉하지 말라는 지시였다. 배를 타고 온 사람들도 각자 갈 길을 갔다. 우리가 사실상 끌고 와버린 월남인 선원들과도 정이 들었다. 악수하고 서로의 건강을 기원했다. 그렇게 5월 11일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에 돌아와 들으니 할머니가 4월 말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할머니께서 나를 여기까지 데려다준 것이었다.

김창근 서기관은 월남 탈출에 성공했지만 이대용 주월남대사관 대사는 안타깝게도 북베트남군에 붙잡혔다. 그는 사이공 형무소에서 5년간 옥고를 치르고서야 석방될 수 있었다. 김 서기관은 2011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사람도 나라도 남에게 절대 의지하면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우리 스스로 국력을 길러야 한다"고 회고했다.

js8814@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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