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사적 영역 사이서 '아슬아슬한 줄타기'
정치자금은 정치활동에 없어선 안 될 토양이다. 동시에 정치 불신을 키우는 계기가 되기도 하며, 때로는 정치인의 정치생명을 좌우하기도 한다. 최근 김승희 전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는 국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정치자금으로 개인 차량을 구입한 사실이 드러나 낙마했다. 검찰은 이 사건을 약식기소했다. 정치자금의 대부분은 지지자들의 후원금, 선거보전비용으로 채워진다는 측면에서 '네돈내쓴(네 돈으로 내가 쓴다)'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국민의 의혹을 사는 일이 없도록, 공명정대하게, 정치활동을 위해서만 쓴다'는 전제 조건이 붙는다. 21대 국회에서 이 조건은 잘 지켜지고 있을까. <더팩트>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정보공개를 청구해 확보한 2020년 후반기, 2021년 정치자금 수입·지출 내역을 집중분석했다. 나아가 공정한 정치자금 사용을 위한 개선 방향을 모색한 '네돈내쓴 정치자금' 기획 5편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더팩트ㅣ박숙현·김정수 기자] 발음 교정을 위한 스피치 학원 등록, 의정활동 역량 강화를 위한 외국어 학원 결제, 대학원 최고위 과정 등록. 21대 국회의원들이 정치자금으로 지출한 자기계발 내역이다. 정치자금은 '공적' 자금인 만큼 엄격하게 '공적 활동'에 한해 쓰여야 한다. 스피치 학원 등이 공적 영역에 해당한다고 받아들이는 국민이 얼마나 될지 미지수다. 국회의원들이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계속할 수 있는 이유는 뭘까.
◆"말을 잘 못해서..." 사설 스피치 학원에 정치자금 긁었다
정동만 국민의힘 의원(초선, 부산 기장)은 2020년 7월 '스피치 연설 교육비' 명목으로 정치자금 165만 원을 사설 학원에 지급했다. 정 의원 측은 초선 의원인 만큼 부자연스러운 말투를 교정하고자 등록했다고 했다. 정 의원은 실제로 일주일에 몇 차례 직접 학원에 가서 수업을 들었다고 한다.
윤영석 국민의힘 의원(3선, 경남 양산갑)은 지난해 9월 사설 음성 클리닉에 100만 원을 결제했다. 윤 의원 측은 평소 목을 많이 사용한 점도 있고 발음과 발성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등록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정재 국민의힘 의원(재선, 경북 포항시북구)은 지난해 6월 '의정활동 관련 스피치 강습료' 240만 원을 사설 코칭 학원에 썼다. 김 의원 측은 잦은 방송 출연으로 당의 입장을 명확하게 전달해야 하는데 사투리가 있다 보니 스피치 코칭을 받는 것이 어떠냐는 주변 권유가 있었다고 전했다.
윤주경 국민의힘 의원(초선, 비례)은 지난해 2월 '의정활동 역량 강화를 위한 연설 스피치 강의료' 220만 원을 지불했다. 이 의원이 등록한 곳은 아나운서 등을 배출하는 유명 스피치 학원이다. 윤 의원 측은 처음 의정활동을 시작할 때 말을 자연스럽게 하지 못해서 연습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어 수강하게 됐다고 한다.
이들은 적법하게 정치자금을 지출한 걸까. 답은 그렇다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발간한 '정치자금 회계실무'를 살펴보면 국회의원의 학원 강습은 의정활동과 연관성이 있는 경우 정치활동에 포함된다고 설명한다.
또한 선관위는 '정치자금으로 지출할 수 있는 사례'에 △의정·입법활동과 관련한 경비 △의정·입법활동에 직접 소요되지는 않지만 간접적으로 활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경비 등을 적시했다. 결국 의정활동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면 정치자금으로 사용해도 무방하다는 해석이다.
◆영어·일어 공부도 정치자금으로..."의정활동 일환으로 문제없다"
모호한 기준 탓에 스피치 학원 외에도 사설 외국어 학원 교육 과정을 등록한 의원도 더러 있었다. 김선교 국민의힘 의원(초선, 경기 여주시양평군)은 지난해 3~4월 사설 일본어 학원에 외국어 과정 교육 9만 원을 결제했다. 김 의원 측은 한일의원연맹 소속 의원인 만큼 간단한 일본 인사라도 할 수 있게끔 미리 준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허은아 국민의힘 의원(초선, 비례)은 2020년 7월 사설 영어학원에 22만2750원을 결제했다. 허 의원 측은 의정활동의 일환으로 이해해달라며 말을 아꼈다.
임이자 국민의힘 의원(재선, 경북 상주·문경시)은 지난해 11월 '상임위 관련 외국어교육' 명목으로 사설 영어 학원에 39만6000원을 결제했다. 임 의원 측은 지난해 11월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에 한정애 당시 환경부 장관과 동행할 계획이어서 관련 공부를 몇 개월 정도 준비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임 의원은 일정상 행사에 참석하지는 못했다고 전했다.
박수영 국민의힘 의원(초선, 부산 남구갑)은 지난해 12월 '외국어 회화 수업 수강료' 명목으로 사설 영어학원에 13만2000원을 결제했다. 박 의원 측은 국회사무처에서 국회의원들을 대상으로 외국어 공부 신청을 받았고, 국회에 강사들이 와서 직접 강의를 했다고 설명했다. 비슷한 사례로 전해철 민주당 의원(3선, 경기 안산시상록갑) 역시 2020년 '글로벌 의정활동 능력 향상'을 위해 국회사무처 영어 수강료 22만2750원을 지출한 바 있다.
◆공부도 하고 인맥도 쌓고...의원들이 즐겨 찾는 '대학원 최고위 과정'
대학원 최고위 과정을 정치자금으로 수료하며 공부도 하고 인맥도 쌓은 의원들도 있다. 선관위는 의원들의 대학 최고위 과정 등록이 의정활동 또는 입법활동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라면 등록금을 정치자금으로 지출하는 것을 무방하다고 봤다. 앞선 학원 강습비 등록과 마찬가지로 의정활동 연장선으로 '판단'된다면 정치자금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장경태 민주당 의원(초선, 서울 동대문을)은 지난해 서울대학교 최고위 과정 등록금 905만 원과 최고위 과정 자치회비 100만 원을 정치자금으로 납부했다. 장 의원 측은 "직접 수업을 들었고 지난해 수료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최고위 과정이 보통 여러 사람을 만나러 가는 측면이 있어 정치활동에 필요한 인맥이라든지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된다"고 덧붙였다.
최고위 과정을 등록한 의원은 장 의원 외에도 여럿 있었다. 윤영석 국민의힘 의원은 2020년 10월 경남대학교 '통일미래 최고위 과정 등록'을 명목으로 103만 원을 결제했다. 윤 의원 측은 "국회의원들이 의례적으로 하는 최고위 과정"이라고 했다. 윤 의원은 지난해 8월 동일한 최고위 과정인 '경남카네기연구소'에 224만 원도 결제했다.
양금희 국민의힘 의원(초선, 대구 북구갑)은 지난해 3월 영남대학교 최고경영자 과정에 등록비 110만 원을 지불했다. 양 의원 측은 1년이 채 안 되는 기간으로 1주일에 1번 공부를 했고, 95기로 수료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정치 의정활동 등과 관련해 의원이 필요한 부분을 채울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수진 민주당 의원(초선, 비례)은 지난해 서울대학교 지식정보최고위 과정을 800만 원에 등록했다. 이 의원 측은 인문학, 기후 위기, 4차 산업혁명, 인구학 등 의정활동에 도움이 되는 내용들이 있었다며 매주 월요일 3시간 수업을 들었다고 했다. 이 의원은 지난해 5월 말 입학해 지난 2월 초 수료했다.
◆모호한 규정에 모호한 해석...어디까지 공적 영역?
스피치 학원부터 대학원 최고위 과정까지 등록한 의원 측에서는 이구동성으로 선관위의 해석을 받아 적법하다고 입을 모은다. 또한 의정활동 역량을 키우기 위한 자기계발이었다고 설명했다. 선관위 규정에 따른 것이라 하더라도 의원들이 자기계발에 정치자금을 사용한 것은 국민 눈높이와 충돌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선관위의 해석과 국민 정서 또는 양심 등을 비춰봤을 때 경계가 모호해진 사례라고 보여진다"라며 "국회의원이 월급을 받지 않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기준을 좀 높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참여연대 관계자는 "국회의원들이 공적 마인드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라며 "정치자금은 말 그대로 공적 자금이고 공적 활동에 쓰라고 있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 관계자는 또 "국회의원들이 창피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이라며 "사적인 영역에 공적 자금을 쓴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엄기홍 경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법적으로 문제가 없겠지만, 윤리적으로 문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모호한 규정들에 대해서는 사회적 합의를 통한 감시가 필요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반면 국회의원이 자기계발을 통해 의정 능력을 높이는 행위는 진정한 의미의 정치자금 사용이라고 볼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국회의원들은 통상 여러 상임위원회를 거치게 되는데 해당 분야의 전문 지식이 부족하다면 이를 보충할 수 있다"며 "이를 규제한다는 건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긍정적이라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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