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에도 웃을 수 없는 그들의 속사정
[더팩트ㅣ국회·동대문=임현경 인턴기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추석은 한해 농사를 끝내고 오곡을 수확한 시기에 보내는 우리 겨레 최대 명절이다. 조상신에 풍년을 감사하고 식구들이 풍성한 식탁에 둘러앉아 보내는 큰 행사였기에, 이전부터 '한가위처럼만 행복하길 바란다'는 옛말이 전해져왔다.
그러나 온 가족이 둘러앉아 만찬을 즐기고 이웃과 두터운 정을 나누던 '반가운' 추석은 옛일이 됐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추석을 두려워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한가위만 같으면 큰일'이라는 것이다. 이에 <더팩트> 취재진은 저마다의 사연으로 '추석 포비아(공포증)'를 외치는 이들의 속 사정을 들어봤다.
◆추석은 가족 불화의 씨앗?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청원 및 제안 게시판에는 9월 이전부터 추석을 없애 달라는 요청이 다수 게시된 상황이다. 특히 "추석 연휴가 너무 길다"는 불만이 쇄도했다. 한 청원인은 "농경 사회가 아닌데 가족 모임은 설 연휴로 충분한 것 아니냐"며 "차라리 제헌절이나 식목일을 공휴일로 지정하라"고 요구했다. 연휴로 인한 교통체증과 생활 시설 휴무가 불편하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또 다른 청원인은 "명절 연휴 때문에 집안에 분란이 일어난다"며 "대가족이 모여 사이가 돈독해지기보다는 긴장이 고조되고 불화가 생겨 부담과 피로가 극심하다"고 호소했다. 연휴에도 쉴 수 없는 부모의 경우 보육 시설이 장기간 운영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문제가 된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자신이 전업주부라 밝힌 한 시민은 "남편이 연휴 내내 일을 하는데 9일간 독박 육아를 할 생각을 하니 벌써 속이 답답하다"고 토로했다.
◆국정감사 앞둔 국회 보좌진 "고향 안 가는 게 마음 편해"
국회 보좌진 역시 "추석에 쉬지 않는 게 차라리 낫다"고 입을 모았다. 10월부터 시작될 국정감사 준비에 쏟을 시간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모 의원 비서 A 씨는 "연휴 전부는 아니지만, 며칠은 쉴 수 있을 것"이라면서도 "쉬기 전에 미리 해둬야 하는 일들이 워낙 많은 데다, 고향에 가서도 쌓인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지 않아 하루 만에 서울로 돌아오는 선배들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이 고되지 않냐'는 기자의 물음에 "그래도 국회 1년 중 가장 큰 일인데 허술하게 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며 "중요한 일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힘든 것도 참고 하게 되는 것 같다"고 답했다.
보좌관 B 씨는 "요즘 체력단련실이 북적인다. 지치지 않기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며 웃었다. 이어 "국정감사 한 달 전부터는 야근이 잦아지고 여기(의원회관)서 일하는 모두가 예민해진다"고 덧붙였다. 그는 "7월부터 자료를 요구해놓고, 분석, 문제점도 조사한다"며 "대정부 질문, 인사청문회, 국감까지 겹치면서 일이 정말 많다. 해도 해도 부족한 부분이 계속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는 "남들과 똑같은 질문을 할 순 없으니 독창적이면서도 유의미한 개선을 위한 질의 거리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며 "공익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하고, 보좌진 개개인의 역량을 보여줄 수 있는 무대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C 씨는 "밖에서 봤을 땐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들인 줄로만 알았는데, 실제로 겪어보니 그게 아니었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연휴 내내 국회에서 일을 하다가 국감이 시작된 지 이틀째 되는 날 일을 그만두고 고향에 간 사례도 있다"며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일이고, 우리 의원님을 살리는 일이지만 그만큼 부담감이 엄청나다"고 했다. C 씨는 "지금 또 자료요청 관련 전화가 왔다"며 다급히 말을 마쳤다. 귀한 시간을 더 빼앗을 수는 없어 그를 잡지 않았다.
◆짐 되지 않으려면…무거운 걸음 옮기는 노인들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들이 반가운 한편, '집안 어른'으로서의 책임감을 무겁게 느끼는 이들도 있다. "손주들 용돈이라도 주려면 열심히 일해야지" 지하철역 부근 벤치에서 만난 김 씨는 올해 86세의 '실버 택배' 기사다. 실버 택배란 노인들이 업체를 통해 의뢰받은 물건을 직접 배송하는 일로, 대중교통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이점을 활용한 것이다. 거리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하루에 2~4건 정도를 맡을 수 있고, 평균 2만 원 내외를 벌어간다.
"같이 일하던 양반이 잠깐 졸다가 물건을 놓고 그냥 지하철에서 내린 거야. 안에 100만 원이 넘는 밍크 목도리가 들어있는데 누가 상자를 홀랑 가져가 버려서 다 물어줘야 했어." 작은 실수라도 했다간 택배 일을 꼬박 1년 해야 벌 수 있는 돈을 단숨에 날려버릴 수 있었다. 김 씨도 요새 자주 깜빡깜빡하는 것이 고민이라고 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일을 그만둬야겠지만, 지금 당장은 포기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김 씨는 "자식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 추석에 찾아온 가족들에게 용돈 정도는 쥐여줘야 하지 않겠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김 씨의 휴대폰에 배달 요청이 들어왔다. 목적지는 성남에 있는 한 가정집이었다. '여기서 성남까지 가시냐'고 묻자 김 씨는 "멀면 돈을 더 벌 수 있으니 좋다"며 "이 정도 거리면 15000원을 받는데, 절반은 회사가 가져간다"고 말했다. 김 씨는 "더 길게 얘기하면 좋았을 것"이라면서도 서둘러 일어나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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