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헌법 24조는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선거권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참정권에 차별을 둘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시각·청각·발달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참정권 행사는 또 하나의 벽이다. 후보자가 누구인지, 공약은 무엇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등등 주권자인 이들에겐 극히 제한적인 정보뿐이다. 2007년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됐지만, 현실은 여전히 '소수자'로 차별받는다. 이에 <더팩트>는 장애인의 투표할 권리 보장을 위한 일환으로 '투게더 6·13-장애인 참정권'을 기획,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발달장애인지원비영리단체 '소소한 소통', '지방선거장애인연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전·현직 국회의원' 등과 함께 장애인 참정권 실태와 대안을 취재했다. 모두 6차례에 걸쳐 ▲투표 체험 ▲선거 공보물 ▲각 당의 장애인 공약의 현실성 ▲인터뷰 ▲전문가 진단 등을 주제로 싣는다. <편집자 주>
전문가들 "일방적 개선보다 장애인 의견에 귀 기울여야"
[더팩트ㅣ정치플러스팀=이철영·오경희·신진환·김소희·이원석 기자·임현경 인턴기자] 장애인들은 같은 국민으로서 정당한 요구가 '다름'으로 차별받는 현실에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헌법이 보장하는 참정권 행사마저도 장애인들에게는 버거운 것이 현실이다.
장애인 전문가들과 전·현직 국회의원, 장애인들 모두 이에 대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설익은 공약과 장애 종류에 따른 맞춤형 개선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8년 현재 전국에 등록된 장애인 약 250만 명 가운데 시각장애인은 약 25만 명이다, 발달장애인은 21만 명으로 추산된다. 장애인으로 등록되지 않은 수까지 합치면 400만 명 정도로 추산되며 전체 인구의 8% 정도다.
<더팩트>는 지난 5일부터 5일간 '투게더 6·13-장애인 참정권'을 연재했다. '마지막 회-전문가에게 듣는다'를 주제로 취재 기간 제기됐던 문제점에 관한 대안을 김훈(공학박사)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정책연구원, 발달장애인 지원 비영리단체 소소한 소통 백정연 대표, 최동익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 이종명 자유한국당 의원 등에게 묻고, 들어보았다.
이들 전문가들은 선거철만 되면 장애인들의 참정권 보장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지만, 개선이 더디다고 판단했다. 장애인 유권자 당사자들이 끊임없이 자기 결정권과 선택권을 요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시력을 잃은 시각장애인과 인지능력 및 의사소통 능력이 부족한 발달장애인의 참정권 보호는 아직 미흡하다. 시각·발달장애인의 기본권과 권익을 보호를 위해 이들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하고 선거에 반영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 "접근성이 갖춰진 음성기기가 나을 수도"
지난달 24일 서울 여의도에서 만난 김훈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정책연구원은 시각장애인이다. 김 박사는 25만 명의 시각장애인이 정보 접근의 어려움과 비밀투표의 침해를 먼저 지적했다. 시각장애인 유권자 수는 6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김 박사는 "시각장애인은 점자형 선거 공보물을 받는다. 그런데 음성으로 표출되는 즉 음성전환코드로 대체하려는 후보자가 많다"며 "음성전환코드는 흔히 비장애인들이 보는 선거 공보물 오른쪽 위에 음성바코드가 있다. 가족과 같이 생활하는 시각장애인들은 바코드를 인식하는 작업에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혼자 사는 분들은 어렵다. 여러 후보자는 돈이 적게 들고 편하다 보니 음성전환코드를 선호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점자를 사용하는 인구가 적고 시각장애인 당사자들이 전자식 표시를 선호한다는 것을 근거로 전자식 표시를 장려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잘못된 정보다. 의견 수렴이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고 지적했다.
실제 한 시각장애인은 음성 출력의 장점은 '면수 제한'이 있는 점자형 선거 공보물보다 후보자들의 정보가 많다는 장점을 들었다. 하지만 바코드에 인식할 수 있는 과정이 어렵다고 했다. 앞을 볼 수 없어 스마트폰이나 전용 리더기가 인식할 수 있도록 렌즈와 바코드가 정확히 맞물리게 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현행법상 공보물은 면수가 정해져 있으며, 시각장애인 점자 활자는 일반 글씨보다 커 점자형 선거 공보물 내용이 부실하다는 지적이 있다. 장애인에게 제공되는 선거공보와 비장애인 선거공보 면수는 차별 없이 똑같은 8면(후보 1인당)이다. 현행법상 선거공보 제작 면수는 ▲대통령 선거 16면 이내 ▲국회의원 및 지자체장 선거 12면 이내 ▲지방의원 선거는 8면 이내로 작성할 수 있다.
점자 크기를 고려할 때 시각장애인에게 제공되는 점자형 선거공보에 비장애인이 보는 선거공보 내용을 모두 담는 건 불가능하다.
시각장애인인 최동익 전 더불어민주당 전 의원도 점자형 선거공보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면수 제한도 문제지만 점자 자체도 문제가 많기 때문이다.
최 전 의원은 "점자 공보물을 만들 수 있는 적법한 기관도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그것들을 일반 기획사에 넘겨버린다. 점자를 만드는 업체가 점자를 만들 수 있는 제대로 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고 꼬집으며 "그냥 '점자면 된다'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고 시늉만 하는 정치권과 선관위를 강하게 비판했다.
문제는 또 있다. 선관위의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ARS·자동응답시스템) 투표안내 서비스이다.
김 박사는 "연합회에서 시각장애인이 전화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방안을 마련해달라고 해서 선관위가 이 서비스를 만들었다. 그런데 실제 전화를 걸어보니 투표일·투표 절차·신분증 지참 등 간단한 안내 사항 등 기본적인 정보만 하고 전화가 딱 끊긴다"고 말했다.
정작 알아야 할 후보들에 대한 정보나 공약 등은 설명이 없다는 것이다. 김 박사는 "후보들에 대한 정보나 공약 등을 함께 제공하면 시각장애인들이 정보에 접근하기가 수월하지 않겠나"라며 "분명 선관위가 시각장애인의 참정권 보장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어떤 것을 요구하는지 의견을 모아 서비스를 해야 하지 않겠나. 선관위의 일방적인 개선책"이라고 꼬집었다.
김 박사는 시각장애인이 청각에 많이 의존한다고 했다. 음성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투표 역시 음성 체제로 이뤄지면 시각장애인이 투표하기가 쉬워질 것이라는 대안을 내놨다. 게다가 비밀투표 침해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시각장애인은 투표할 때 직계가족이 돕지 않으면 활동보조인을 대동하는데, 이때 선관위 직원이 기표소에 들어가 감독하며, 이 때문에 비밀투표가 아니라는 논란이 지속해서 제기되고 있다.
김 박사는 "ATM(현금자동인출금기)이 좋은 모델이다. 일반 ATM처럼 시각장애인용 ATM기도 있는데, 모든 것이 음성으로 돼 있다. 비밀번호 등이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반드시 이어폰을 끼고 이용하게 돼 있다"면서 "관건은 접근성이 갖춰져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투표할 수 있는 음성 ATM기가 있다면, 누구든지 그 근처에만 바래다주면 된다. 그것이 터치스크린이든 키패드든 상관없다. 음성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 대안을 제시했다.
◆ "외국의 사례처럼 사진투표용지 만들어야"
또, 발달장애인들이 투표용지만으로 지지하는 후보가 누구인지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발달장애인이 투표할 때 가장 어려운 점으로 꼽는 것은 바로 '이해'다. 인지 능력이 다소 낮아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 정도가 더 심한 중증 발달장애인은 후보자들이 내세운 공약이나 인적 사항 등을 알기가 더욱 어렵다. 백 대표는 발달장애인을 위해 '쉽게 설명한 문서'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선거 안내서나 공보물 등을 발달장애인이 이해하기 쉽도록 바꿔 제공하고 있다.
지난달 29일 서울 신도림에서 만난 백 대표는 취재진에게 대뜸 자료부터 건넸다. 외국의 투표용지 사례라며 이해하기 쉬울 것이라고 했다. 투표용지에는 정당 로고나 후보자의 얼굴이 함께 인쇄돼 '누가 몇 번인지' 기억하기 쉽게 만들어졌다. "글자를 잘 모르는 사람도 훨씬 이해하기 쉽겠죠?"라며 백 대표는 강조했다.
백 대표는 "생활하기 어려운 중증 발달장애인은 투표 행위 자체를 이해하는 것도 어려워한다. 이들도 유권자라면 동등한 환경을 제공받을 권리가 있다"며 "이들이 기표하는 행위는 가능하더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지원하려면 매우 노력해야 한다. 그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발달장애인 중에서 자발적 혹은 친절한 설명이나 안내 등 보조만 있다면 투표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이 많다"고 설명했다.
발달장애인은 이해력이 떨어지기에 무엇이든 최대한 알기 쉽게 설명해야 한다는 게 백 대표의 주장이다. 선관위도 발달장애인 유권자의 이해를 위해 다양한 그림을 삽입하고, 선거 관련 용어를 최대한 쉽게 풀어서 작성한 투표 안내 자료를 만들었다. 또 투표 안내 책자 등도 어렵지 않은 용어와 그림, 확대문자를 이용하여 설명해 만들었다.
그러나 백 대표는 선관위의 노력을 인정하면서도 "발달장애인 유권자 당사자들의 요구는 투표용지에 후보자의 사진이나 정당 로고 등의 그림"이라며 "투표용지에 후보자의 사진이 있다면 기억해둔 후보에 정확히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다. 글을 모르는 이들이 많다. 현행 투표용지는 발달장애인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장애인도 기회만 있으면 투표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회인식개선이 근본적으로 선행돼야 한다"며 "당장 지역사회가 확 바뀌긴 어렵다. 그렇지만 똑같이 참정권을 보장받기 위해 장애인의 교육적 측면을 지역사회에 알려야 하고, 무엇보다 당사자의 시각에 맞도록 공보물이 쉽게 바뀌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외에도 장애인들의 참정권 보장을 위해서는 장애인 이동권 개선을 위한 정치권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선거 때마다 장애인 이동권과 관련된 공약을 내놓지만, 지켜지지 않는 것도 정치권이 반성해야하는 대목이다.
장애인 참정권은 물론 이동권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장애인들의 직접적인 정치 참여가 확대돼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린다. 장애인 비례대표 현실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지난 19대 국회에선 김정록 전 의원(당시 새누리당)과 최동익 전 의원(더불어민주당)이 장애인 몫으로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일했지만, 20대 국회에선 장애인 대표로 비례를 받아 당선된 이가 단 한 명도 없다.
지체장애가 있지만 20대 국회에서 군 전문가 비례대표로 당선된 이종명 자유한국당 의원은 정치권의 장애인 홀대가 심각하다고 보았다.
그는 "제가 직접 여기(국회)에 와서 보니까 장애인 대표가 좀 있어야 한다고 느꼈다"며 "장애인이 등록되지 않은 수까지 합치면 4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전체 인구의 8% 정도다. 그렇다는 건 10명 중의 1명은 장애인 대표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권이 장애인에 대해선 여야 할 것 없이 너무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국회뿐만 아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장애인 비례대표에 문제가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2018지방선거장애인연대에 따르면 이번 지방선거에서 광역의원비례대표 후보로 추천된 300명 중 장애인 후보자는 25명(약 8%)이다. 지난 2014년 제6회 지방선거 때 광역의원비례대표 추천 후보 수가 22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3명이 늘었다.
후보자 수가 늘었지만, 문제는 '순번'이다. 지역별로 차이가 있지만 여야는 장애인 후보 다수에게 3번 이상의 순번을 줬다. 공직선거법 상 비례대표 배정을 받기 위해서는 최소 5% 이상의 정당 득표율을 얻어야 한다. 서울의 경우 민주당 지지율이 50%이상일 때 최대 5~6번이 당선 마지노선이다. 이를 고려할 때 이번 지방선거에서 당선될 장애인 비례는 9~11명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지난 선거에서 광역의원 장애인 비례후보 22명 중 50%인 11명이 당선된 것보다 이번 선거에서의 당선 비율이 낮을 수밖에 없다.
이 의원은 "적어도 각 당에서 비례대표에게 순번을 줄 때 당선 가능성이 있는 번호를 주어야한다고 생각한다"고 했고, 최 전 의원도 "수는 늘었지만 특히 서울 같은 경우 당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 매우 아쉬운 점"이라고 지적했다.
장애인들은 '비장애인과 다를 뿐 우리도 같은 국민'이라고 말한다.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참정권 행사에 불편함과 차별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하는 현실에 또 한 번 상처받는다. 전문가들은 장애인들의 참정권 개선은 '다름'에 대한 인정과 사회적 인식 전환 그리고 장애인에 대한 정치권의 문호 개방이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게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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