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시청·광화문=서민지 기자] 박근혜 대통령 취임 4주년을 맞은 25일 서울시청(덕수궁)과 광화문의 풍경은 달랐다. 시청부터 광화문 광장까지는 걸어서 불과 10분 남짓 걸리는 거리. 시청 앞 광장은 태극기로, 광화문 광장은 촛불과 노란 리본으로 가득 찼다.
시청과 광화문 사이 2중 차벽은 양극단의 '휴전선'을 의미했다. 오후 4시 차벽으로 가로막힌 시청부터 광화문까지 세종로를 따라 걸었다. 포근한 날씨 속 양쪽에서 펼쳐진 풍경을 태극기의 눈으로, 또 촛불의 눈으로 지켜봤다. 길거리엔 3·1절을 맞아 태극기가 게양됐다. "시비 말고 지나가라"는 경찰의 목소리도 자주 들을 수 있었다.
◆ 시청역으로 가는 지하철…'촛불 vs 태극기' 충돌
50대 남성 김 모 씨가 태극기를 든 무리를 향해 "언제부터 태극기가 이런데 동원됐어? 돈 5만 원에 어떻게 그래요?"라고 소리쳤다. 일순간에 노량진에서 시청역으로 향한 지하철 1호선 2-2칸에서 언성이 높아졌다.
광명에서 왔다는 50대 여성 A 씨는 커다란 태극기를 바닥에 '쿵' 내리치며 "뭘 안다고 삿대질이야? 돈 받은 것 봤어?"라고 말했다. 작은 태극기 두 개를 든 50대 여성 B 씨도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아이고, 문재인이나 잘하라 해. 그저 북한, 북한"이라고 거들었다.
'문재인'이란 단어가 나오자 김 씨의 목소리는 한층 높아졌다. "뭐? 누가 북한 좋다고 했어? 박근혜 대통령은 피의자잖아. 자식들은 힘들게 광화문 가서 촛불집회 하는데, 어른들이 뭣들 하는 짓이야. 돈 안 받고 나간다고? 그래도 나가는 게 말이 돼? 최순실과 국민연금 6000억 원을 해 먹었어요."
태극기를 든 50대 여성들은 붉으락푸르락 한 얼굴로 김 씨에게 "뭐에요?"라고 쏘아붙이며 태극기를 흔들었고, 김 씨도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2-2번 칸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나이가 지긋한 70대 한 할아버지는 "거참, 조용히 좀 갑시다. 둘 다 입 좀 다물어요"라고 중재에 나섰다. 또 다른 50대 남성도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거니까 서로 존중하고 지하철에선 싸우지 맙시다"라고 힘줘 말했다.
각종 민원이 나오자 둘 다 입을 꾹 다물어 상황은 일단락됐다. 열차는 어느새 시청역에 도착했다. 열차 문이 열리자, B 씨는 분이 안 풀린 듯 내리다 말고 뒤를 돌아보며 "어디 한 번 가봅시다! 누가 진짜인지. 진실이 뭔지!"라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김 씨가 대꾸하기도 전에 열차 문은 닫혔고, 태극기 무리는 시청역 2번 출구 덕수궁 방향으로 빠져나가 대열에 합류했다.
◆ "박근혜, 우리가 지킨다" 태극기 흔드는 사람들
시청역 2번 출구 덕수궁 앞 대한문. 대통령탄핵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운동본부(탄기국)의 '제14차 탄핵 무효 애국집회'가 한창이다. 특히 박 대통령의 취임 4주년을 맞아 '태극기가 (박 대통령을) 지켜드리겠습니다'란 구호를 전면에 내걸었다.
참석자는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40~60대 중장년층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태극기를 머리 위로 흔들거나 태극기를 망토처럼 두르고 '탄핵 무효'를 외쳤다. 모피를 걸친 60대 한 여성은 '6·25 노래'에 맞춰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덩실덩실 춤을 췄다.
때로 20대 청년도 보인다. '롤업진'에 '폴로셔츠'를 입고 말끔한 차림으로 태극기 집회에 참석한 임창석 씨(26·상도동)는 "우리나라가 지금 분위기에 휩쓸려 지나치게 '좌'쪽으로 편향돼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이번 고영태 씨 관련 녹취 파일 공개도 영향을 받았다. 그가 꾸민 일 아닌가. 이번 사안을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임 씨와 동행한 오현석 씨(26·상도동)는 "원래 정치성향이 '보수'지만 나라가 이대로 가선 안 된다는 생각에 촛불집회도 갔었다. 근데 정말 변질했더라. 이석기를 풀어줘야 한다는 내용의 플래카드를 보고 대단히 실망했다. 나라가 혼란스러운데 탄핵으로 가면 더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다. 탄핵은 기각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대리인단 김평우 변호사가 등장하자 참석자들은 환영했다. 김 변호사는 헌법재판소 결정에 승복하지 않을 것을 시사하며 "요즘 국회의원부터 장관까지 무조건 헌재 결정에 승복해야 한다더라. 지금이 조선 시대냐. 복종하라면 복종해야 하는 우리가 노예냐"라고 말했고, 관중들은 태극기를 들며 환호했다.
◆ "무섭다" '태극기 집회' 바라보는 20대 '촛불들'
태극기 집회가 한창인 가운데, '갓길'에선 경찰의 경비가 삼엄하다. 오후 5시 시작인 광화문 집회 참석자들과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노란색' 세월호 배지를 가슴팍이나 가방에 달고 다니는 숫자가 많아지자 경찰은 병력을 강화했다.
길가 통행을 통제하는 경찰 옆에 서 있던 C 씨(50대). 조각난 전단을 들고 화를 냈다. 전단에는 '박근혜는 왜 버림을 받았는가'라는 내용이 써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이거 좀 보라. 너희도 알 건 알아야 한다. 사기다. 사기"라고 흔들며 성을 냈다.
C 씨는 가족사도 꺼냈다. "우리 아들이 한국외국어대학교를 다니는데, 그런데 요즘 들어 촛불집회에 매주 참석한다. 동문인 문재인을 지지한다더라. 의식이 완전히 빨갛게 물든 것 같다. 속상해서 이천에서 올라왔다"고 했다. (사실 문 전 대표는 경희대학교 출신이다.) 같이 태극기 집회에 침가한 D 씨는 조용히 팔을 끌어당기며 "지나가는 사람에겐 그러지 말라"고 말렸다.
지나가던 대학생 한 모 씨(21·여)와 친구 일행은 웃음을 터뜨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 씨는 웃은 이유를 묻자, C, D 씨가 시야에서 멀어진 것을 확인한 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신다. 근데 욕하고 소리를 지르시니까 너무 무서워서 빨리 빠져나왔다"고 말했다.
◆ "우리가 이나라 어떻게 만들었는데" '촛불' 보는 '태극기들'
차벽 사이를 지났다. 중간지점인 '코리아나 호텔'쯤에서 태극기를 들고 뒷짐을 지고 가는 70대 할아버지 E 씨를 만났다. 바바리코트를 입고, 베레모에 선글라스와 목도리를 착용한 E 씨는 느릿한 걸음으로 주변을 살피며 걸었다. 시청 쪽에선 "탄핵 무효"가 들렸고, 광화문 쪽에선 "지긋지긋한 박근혜 정권을 끝내자"는 외침이 울렸다.
이순신 동상 앞에 도착하자, 배치된 경찰이 E 씨를 막아섰다. 경찰은 E 씨에게 "괜히 사람들이 시비를 걸 테니 태극기를 품에 넣으라. 위험하다. 아니면 지하차도로 가시라"고 권유했다. 처음엔 "왜냐"고 반박하던 E 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태극기를 '돌돌' 말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선 선글라스를 벗고 먼발치에서 20대부터 40대까지 주로 '젊은층'으로 채워진 촛불집회를 지켜봤다. '퇴진행동'은 이날 '박근혜 4년, 이제는 끝내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오후 5시부터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전국집중 17차 범국민행동의 날' 촛불집회를 열었다.
E 씨는 퇴진행동의 구호가 격해지자 얼굴을 찡그리며 광화문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에서 '청년당'이 진행하는 '힙합공연'도 한참을 보다가, "박근혜를 구속하자. 헌재는 탄핵하라" 플래카드를 든 아이의 사진을 찍어주는 부모도 쳐다봤다.
E 씨에게 '어떤 생각을 했냐'고 묻자, "우리가 얼마나 고생해서 이 나라를 만들었나. 박정희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끼니 걱정 안 하면서 지금처럼 살 수 있었겠나. 물론 박근혜 대통령 때문인 줄은 알지만"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숨을 쉬며 이내 정부 서울청사 골목으로 사라졌다.
- 발로 뛰는 <더팩트>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 ▶카카오톡: '더팩트제보' 검색
- ▶이메일: jebo@tf.co.kr
- ▶뉴스 홈페이지: http://talk.tf.co.kr/bbs/report/write
- - 네이버 메인 더팩트 구독하고 [특종보자▶]
- - 그곳이 알고싶냐? [영상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