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박종권 편집위원] 말이 어렵다. 우선 발음이 그렇다. 말(言)은 장음이다. 길게 끌듯이 발음한다. 반면에 말(馬)은 단음이다. 짧게 발음한다. 요즘이야 장음과 단음을 별로 구별하지 않지만, 방송인들과 아나운서들은 지금도 훈련을 받는다.
이런 말들이 제법 있다. 밤(夜)과 밤(栗)이 헷갈린다. 기나긴 밤은 오히려 짧고, 한입에 털어 넣는 밤은 길다. 발(足)과 발(簾)은 쉽다. '숏다리' 발은 짧고, 길게 늘어진 주렴 발은 길지 않은가.
다시 말이다. "이런 말이든 저런 말이든 나쁜 말 말고, 좋은 말이면 두 말 말고 해라." 발음하기에 따라 마시장의 말(馬) 이야기일 수도 있고, 사회생활 속의 말(言)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를 구별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뛰는 말은 빠르니까 짧게, 군자의 말은 천금의 무게이니 느릴 수밖에 없어 길게 발음한다는 식이다.
동네 조폭들은 확실히 구별하는 것 같다. "당신, 말이 짧아~!" 남(男) 저음 목청으로 을러대면 그냥 지나치기가 쉽지 않은데, 기실 "당신 말이 말(言)이야, 말(馬)이야. 하는 말이 말(言)같지 않아서 말이야!"라는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러나 관운장의 적토마는 하룻밤에 백리를 가지만, 저잣거리의 발 없는 말은 천리를 간다고 하지 않던가. 이를 생각하면 발 없는 말이 더 빠른 것 같아 짧게 발음하는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여하튼 헷갈리기도 쉬운 것이 말이다.
바야흐로 말의 성찬(盛饌)이다. 국회야 본디 말로써 말 많은 곳 아닌가. 민주주의란 원래 말이 많은 제도라고도 하지 않는가 말이다. '말의 전당'에 입성하려는 후보들도 벌써부터 이런 말 저런 약속으로 입안에 침이 마른다. 공약(公約)이든, 공약(空約)이든 상관이 없다.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치인의 말에 대한 인식과 말을 대하는 자세는 민주주의가 발달한 서구와는 좀 거리가 있는 것 같다. 예컨대 계약을 중시하는 서구이지만, 일단 말하면 그것으로 구두계약이 성립된 것으로 본다. 한번 말(Word)이면 그것으로 성사(Deal)되는 것이다.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하야한 것은 부정불법보다 '거짓말' 때문이다. 미국에서 가장 인신모독적인 말은 "거짓말쟁이(Liar)"다.
반면 우리네는 "내가 그런 말을 했다는 증거 있어? 있으면 내놓아 봐!"라는 식이다. 게다가 기억력은 선택적이다. 불리한 정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예외 없이 발뺌한다. 헌데 요즘은 방송도 많고, 전국민이 스마트폰을 휴대하고 있어 동영상 증거물이 하나 둘이 아니다.
증거를 들이밀면 준비된 대응이 있다. 바로 '적반하장(賊反荷杖)'에 '물귀신 작전'이다. 예컨대, 대(對)국민 사기극이 녹취록으로 들통나면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이다, 사생활 침해다"라고 역공한다. 그래도 가라앉지 않으면 유력자를 들먹이며 "누구누구도 그랬고, 과거 정부도 그랬다"는 식이다. "우리가 남이가"로 대표되는 '초원복국집 사건'도 지역감정을 부채질한 공직자의 부적절한 처신에서 통신기밀보호법을 위반한 범법행위로 뒤집어졌다.
공약도 그렇다. '경제민주화'는 여당의 대선 공약이었으나 아무런 말없이 폐기처분 됐다. 노인수당도 은근슬쩍 국민연금에 얹어버렸다. '경제민주화'의 입안자 김종인은 야당 대표로, 노인수당의 국민연금 연계에 반대한 진영 전 복지부장관도 야당 지역구 후보로 말을 바꿔 탔다. 그래도 여당은 모든 문제가 "야당 때문"이다.
예전 선거철에는 공약을 몇 퍼센트 이행했다는 자랑이라도 했는데, 요즘은 이마저 쑥 들어갔다. 대놓고 공약(空約)에 위약(違約)이고, 추궁해도 묵묵부답 외면하지 않는가. 그러니 "믿는 건 유권자 자유, 하는 건 정치인 자유"이다. 선거철만 되면 100대 공약은 약과요, 이른바 '천사 공약'까지 나온다. 그들은 ‘1004 공약’이라고 하지만, '1000사기'라는 비아냥도 나온다.
정치인이나 정당의 말이 너무 가벼운 것이다. 그래서 정치인의 말은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이 아니라 '남아일언풍선껌'이라고 한다. 입술에 매달려 부풀었다가 금세 툭 터지는 풍선 껌 말이다.
그래도 정치인들은 자신의 말(Word)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사람은 잊어도 인터넷은 기억한다"고 하지 않던가. 말(馬)은 발음도 짧고 수명도 짧지만, 말(言)은 인터넷 세상에서 지워지지도 않고 길게 남는다. 언제라도 검색하면 곧바로 연관 검색어까지 줄줄이 뜨는 세상인 것이다. 게다가 자신들이 통과시킨 테러방지법 때문에 속담이 바뀌었다. "낮 말은 검경이 듣고, 밤 말은 국정원이 듣는다"고.
여하튼 다산 정약용 말마따나 혀 밑에 자신을 해칠 도끼가 있다. 그래서 노자(老子)도 도덕경에서 "다언삭궁 불여수중(多言數窮 不如守中)"이라 했다. 역시 청구영언에 실린 작자미상의 시조 마지막 연이 의미심장하다.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앞의 '말'은 당연히 길게 발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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