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오경희 기자] 반상에 흑돌과 백돌이 놓여 있다. 바둑판에서 한번 놓은 돌을 다시 집어 올리는 법은 없다. 한치의 양보 없는 싸움이다. 돌을 놓는 것을 완전히 멈춘 순간 승자와 패자가 갈린다. 정치판도 이와 같다.
4·13 총선을 한 달여 앞둔 지금, 크고 작은 '판'이 이곳저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최근 가장 흥미진진한(?) 승부는 역시 김종인(75)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와 안철수(54) 국민의당 상임 공동대표 간 대결이다. 두 사람은 총선을 겨냥한 '야권 통합'을 놓고 반상에 마주 앉았다.
판국의 승패를 좌우할 '승부수'는 김종인 더 민주 대표가 먼저 뒀다. 더 민주는 지난 2일 테러방지법을 저지하고자 8박9일간 진행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합법적 의사 진행 방해)를 중단했고, 여기엔 총선 일정을 우려한 김 대표의 의중이 깔려 있었다. 이로 인해 47년 만에 부활한 필리버스터에 국민들은 뜨거운 관심을 보냈지만, 테러방지법은 결국 국회를 통과했다. 자연스레 김 대표를 향한 책임론이 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김 대표는 '야권 통합'이란 '묘수'로 발빠르게 이슈를 전환했다. 입신의 경지라는 '정치 9단'의 공력을 보여준 대목이다. 정치권 안팎에선 김 대표가 야권 주도권을 쥔 채 상대 진영인 국민의당이 거부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신의 한수'라고 평가했다. 김 대표가 안 대표를 흔들면서 여러 계파가 모인 당 내분을 노린 것이라고 분석했다.
정치 경험이 부족한 안 대표에게 김 대표의 승부수는 '독수(상대를 해치려는 악독한 수)'였다. 문재인 전 대표와 당 지도부 혁신 등을 놓고 대립하다 지난해 12월 13일 더 민주를 탈당한 안 대표는 "패권 세력과 연대할 수 없다"고 여러 차례 못 박았다. '통합'을 받아들인 순간, 자신이 내세워온 새정치의 명분을 저버리는 셈이다.
때문에 안 대표는 '(무리함을 무릅쓰고) 강수'로 받아쳤다. 김 대표의 제안 다음 날(3일) "야권통합 제안은 비겁한 정치 공작"이라고 발끈했고, 심지어 6일 오전 서울 마포구 도화동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죽는다면 이 당에서 죽겠다"며 통합과 연대를 거부했다. 그의 태도와 어조는 강경하고 단호했다.
하지만 한지붕 아래 생각은 다르다. '탈당설' '결별설'이 제기돼 온 김한길 상임선대위원장 측은 연대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안 대표 측과 냉전 중이다. 김 대표는 당장 김 위원장 측의 입장을 환영했다.
김 위원장은 8일 오후 2시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패권주의 청산의 진정성 담보가 선행돼야 야권의 개헌선 저지(야권 통합)를 위한 뜨거운 토론이 있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제 말씀은 더 민주 김종인 대표가 듣고 기뻐하시라고 드린 말씀이 아니라 야권 모두가 느껴야 할 위기감과 절박감, 책임의식을 말씀드렸던 것"이라며 "김 대표는 통합을 제안하면서 계파 패권주의 정치가 부활하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여러 번 공언했지만, 아직까지 그 실천은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어찌됐든 김 대표는 여유롭게(?) 대응했다. 안 대표의 회견에 대해 같은 날 국회에서 "내가 보기에는 안 대표가 너무나 좀 흥분된 상태 아닌가 본다"며 "그래서 극단적인 표현을 써가지고 '죽어도 못하겠다' 하는 이런 표현 아니겠나"라고 지적했다. 그는 '먼저 흥분하면 진다'는 싸움의 법칙을 잘 아는 듯했다.
안팎으로 안 대표는 고립무원인 형국이다. 그래도 그는 아직까지 정면돌파 의지를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그 속내는 편치 않아 보인다. 노원병 재출마를 선언하면서, 홀로 '사방이 적인 광야'에 선 심경을 아내의 말을 빌어 에둘러 고백했다.
"평소 도통 말이 없는 아내가 제게 '괜찮다'고 말했다. 사람들 손가락질을 받아도, 호사가들의 안줏거리가 돼도, 언론의 조롱거리가 돼도, 여의도의 아웃사이더가 돼도, 소위 정치 9단의 비웃음거리가 돼도 아내는 '처음시작할 때 그 마음만 변하지 않으면 괜찮다'고 말했다. 우공이산의 믿음으로 뚜벅뚜벅 걸어가겠다. 그 길에 한번 더 동행해주실 것을 간곡하게 부탁드린다."
이제 총선은 불과 34일 밖에 남지 않았다. 김 대표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한 안 대표는 숨겨 둔 '독수'를 꺼내 반전을 꾀할 수 있을까. 백전노장 김 대표는 굳히기로 한판승을 거둘 수 있을까. 혹자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고 했다. 본디 승부는 예측불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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