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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국회 입성기] ‘농민 운동가’ 신정훈 새정치연합 의원

  • 정치 | 2015-10-30 11:47

신정훈(51·나주시·화순군·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젊은 시절 수세폐지운동에 앞장섰다. 젊은 시절 신 의원이 아내 주향득 씨와 함께 수세폐지운동을 벌이고 있는 모습. /신정훈 의원실 제공
신정훈(51·나주시·화순군·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젊은 시절 수세폐지운동에 앞장섰다. 젊은 시절 신 의원이 아내 주향득 씨와 함께 수세폐지운동을 벌이고 있는 모습. /신정훈 의원실 제공

[더팩트 ㅣ 이철영 기자] 신정훈(51·나주시·화순군·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의 첫인상은 푸근한 동네 아저씨 같다. 그의 지금 모습 어디에서도 날 선 투쟁의 선봉에 섰을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학생운동, 농민운동 등 누구보다 치열한 젊음을 살았다.

신 의원은 지난해 7·30 재보궐선거 나주·화순에 출마해 당선하며 여의도 국회에 입성했다. 그가 여의도 국회에 입성한 것은 지난 1995년 전국 최연소(31)로 전남도의회 의원으로 당선한 지 꼭 20년 만이다.

그가 여의도 국회에 입성하기까지의 삶을 돌아보면 절대 순탄치 않다. 신 의원은 1964년 영산 영월신 씨 집성촌인 나주시 왕곡면 장산마을에서 3남 4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의 집은 부농은 아니었고, 중농쯤 됐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나누는 것을 참 좋아한다. 조부모와 부모의 모습을 보고 자란 탓이다. 특히 그의 할아버지는 남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했다. 좋아한 것이 아니라 그냥 나누면서 함께 살았다.

“내 앞가림만 생각하기보다는 남을 먼저 배려하는 그런 태도는 아무래도 할아버지에게 배웠던 그 유년시절의 기억에서 비롯됐던 것 같다. 평범하게 살지만 베풀고 인정 있었던 할아버지의 그 음덕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 같다.”

그의 정치가 ‘공동체’와 맞닿아 있는 이유도 할아버지께서 몸소 실천하신 나눔을 보고 자란 이유라 할 수 있다.

신 의원의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 /신정훈 의원실 제공
신 의원의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 /신정훈 의원실 제공

신 의원이 말하는 공동체의 시작은 대학생 시절 그리고 농민운동, 도의원과 시장을 거치며 지금에 이르렀다.

1985년 5월 23일 삼민투위(三民鬪委) 주도하에 대학생 73명은 서울 미문화원을 점거하고 72시간 동안 경찰과 대치했다. 학생들은 스스로 농성을 풀고 나와 경찰에 모두 연행됐다. 바로 유명한 ‘서울 미문화원점거농성’ 사건이다.

73명의 대학생 중 신 의원도 있었다. 그는 당시 고려대학교 대표로 가담했다. 그와 학생들이 미문화원을 점거한 이유는 '광주학살의 진상과 그 책임자 처벌' '광주학살에 대해 책임을 지고 미국은 한국 국민 앞에 정중히 사과할 것' '미국의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 지지 이유' 등을 따져 묻기 위해 미 대사와의 면담을 요청했다.

그는 재판장에서 판사를 "당신이 우리를 재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냐? 이런 역사적인 거사를 재판할 수 있는 사람이냐? 우리는 독재정권의 하수인인 재판부의 권위를 인정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결국 '감치 15일' 처분의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그는 미문화원 점거투쟁으로 2년 3개월의 옥살이를 치렀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옥중에 있을 당시 운명했다. 교도소 복역 중 비보를 듣고 고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하관까지 다 해 흙을 덮었고, 관 위만 쓸어놓은 상태였다. 그는 "관을 뜯어 달라"고 했고, 아버지와 마주했다. 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그는 울지 않았다. 1987년 7월 출고하는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고, 아버지 묘소 앞에서 '아버지가 평생 땀에 절어 사시고 한을 품고 묻히신 이 땅에 뛰어들겠다'고 다짐했다. 그의 농민운동은 그렇게 시작됐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영산포성당 청년회 모임에서 한 살 위인 지금의 아내 주향득 씨를 만났고, 함께 '수세폐지운동'을 함께 했다. 수세(水稅)는 당시 농민조합원이 '농지개량조합'에 납부하는 조합비였다. 그러나 명칭만 조합비였지 실상 농사에 사용하는 물값으로 농민들은 '수세'라 불렀다.

나주농민대회에서 연설 중인 신 의원의 젊은 시절. /신정훈 의원실 제공
나주농민대회에서 연설 중인 신 의원의 젊은 시절. /신정훈 의원실 제공

당시 전국 농민이 낸 수세는 1년에 대략 970억 원이 넘었다. 1987년 영산강농지개량조합이 나주지역에 부과한 수세만 20억 원이었다. 조선 시대부터 이어져 온 수세가 일제강점기를 거친 이후에도 여전했다. 그는 농민들의 시름이 깊어지는 것을 지켜봤다. 그가 수세폐지운동에 나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치 지난 1894년 만석보의 개수문제에 따르는 수세징수사건에서 비롯된 ‘동학농민운동’과 비슷했다. 그는 이후 수세폐지를 위해 농민대회를 개최와 교육 등에 전념하다 1989년 5월 13일 지금의 아내와 함께 구속됐다. 그 후 1990년 둘은 부부가 됐다. 부부의 노력으로 수세는 1997년 완전히 폐지됐다.

수세폐지운동에 나섰던 그가 정치에 입문한 것은 1994년 전남 도의원에 나서면서부터다. 그는 1995년 31세의 젊은 나이로 민주당 텃밭에서 무소속으로 출마, 전남 도의원에 당선했다. 그가 당선할 수 있었던 바탕엔 꾸준하게 활동해온 농민운동 때문이었다. 농민들은 늘 자신들의 곁에 있었던 그를 당선 시켰다. 농민들은 그를 2002년 나주시장으로 만들었다. 그는 전국 최연소 지방자치단체장이었고, 농민들은 2014년 그를 여의도 국회로 보냈다.

여의도 국회에 입성한 그의 정치는 조부모와 부모가 그랬듯 나눔의 공동체를 향해 있다. 우리 사회의 균형을 위해서 자기 사명을 다 하는 정치를 하고 싶다는 것이 그의 포부이자 정치적 목표다.

“재벌, 서민이 꼭 맞서는 것은 아니다. 융합되고 윈윈하는 경우도 많다. 선진국의 경우 삶을 중심으로 산업을 배치했지만, 우리는 산업화 과정에서 그렇지 못했다. 이제는 잘살고, 더불어 잘사는 삶, 지속 가능한 삶을 꿈꾸어야 할 때다. 일방적인 이념 중심의 민심이 아니라 균형 잡힌 선순환적인 사회, 함께 잘사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cuba20@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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