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LA에 남가주대학(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이 있다. USC로 줄여 부른다. 이 USC와 UCLA가 미식축구 경기를 하는 날이면, LA가 온통 축제분위기에 휩싸인다. 주립대인 UCLA의 상징은 곰(Bruin)이고, 사립대인 USC의 상징은 ‘트로이인(Trojan)’이다. 그런데 왜 하필 그리스 연합군에 패망한 ‘트로이’인가. 트로이 영웅 헥토르도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스에게 죽고, 종당에는 ‘트로이 목마’에 속아넘어가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 ‘트로이’ 아닌가.
트로이의 ‘부활’은 전승(傳承)과 기록의 덕이다. 먼저 호머(Homer)다. 그의 ‘일리아드’가 없었다면, 트로이는 잊혀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현대의 의식 속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구전(口傳)이 있었기에 하인리히 슐리이만이 소아시아에서 트로이의 유적을 발견했던 것이다.
한 명 더 있다.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다. 그가 로마 건국의 기초를 닦은 아에네아스가 트로이의 망명 영웅이었다는 것을 찬미했을 때 트로이는 비로소 역사적인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었다. 트로이는 망했지만, 트로이의 정신은 로마를 세웠던 것이다. 어쩌면 승자 아킬레스 못지 않게 패자 헥토르의 기개가 찬미되는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 아닐까.
역사는 흔히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그럴 것이다. 영화 ‘300’에서 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는 페르시아 군주 크레스크세스의 복종 권유를 뿌리친다. 이에 크세르크세스는 “모든 그리스 역사가의 눈과 혀를 뽑아 역사에서 지워버리겠다”고 저주한다. 물론 결과는 역사로도, 문학으로도, 영화로도 300명의 기개는 지속적으로 되살아나고 있지만.
징키스칸도 자신을 배신한 호라즘을 멸망시키면서 한때 영화로웠던 기념비적 건물들을 사막의 모래바람 속으로 흩어버렸다. 아예 역사에서 지워버리려 한 것이다. 역사에서 지워버린다는 것은 한 민족과 문명집단과 국가에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주일 것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虎死留皮 人死留名)’는 말은 일종의 ‘영원히 사는 법’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현세의 열락이냐, 역사의 영광이냐”의 갈림길에서 아킬레스는 당연히(!) 후자를 선택한다. 역사는 예로부터 그만큼 무겁고 무서운 것이다.
근대적인 의미에서 역사를 말할 때 크게 두 가지 관점이 있다. 하나는 ‘있는 그대로의 역사’이다. 이른바 ‘가위와 풀의 역사’라 하는데, 가치와 해석을 배제한 사실(事實)의 역사이다. 다른 하나는 ‘선별된 사실’과 ‘역사가의 해석’이 씨줄과 날줄로 엮인 사실(史實)의 역사이다.
에드워드 카(Edward Hallett Carr)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여기서 그의 명저 ‘역사란 무엇인가’의 일부 발췌를 보자.
“……역사가와 역사적 사실은 서로에 필수적이다. 역사가는 현재의 일부이며 사실은 과거에 속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사실을 가지지 못한 역사가는 뿌리 없는 쓸모 없는 존재이다. 또한 자신의 역사가를 가지지 못한 사실 역시 죽은 것이며 무의미한 것이다. 따라서 ‘역사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대한 나의 첫 번째 대답은,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a continuous process of interaction between the historian and his facts, an 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present and the past)라는 것이다.”
결국 역사가의 ‘사실 선택’이 역사의 골간인데, 역사가는 ‘지금(now)과 여기(here)’에 있다. 따라서 그의 판단기준도 바로 ‘지금’에서 비롯되며, 어제의 사실도 오늘의 해석을 통해 ‘선택’된다. 바로 이 선택은 미래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그는 과거의 사실이 역사가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그저 돌무더기나 문서 뭉치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모든 역사는 사유(思惟)의 역사이고, 현재의 눈으로만 과거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역사가는 많고, 당연히 관점도 다양하다. 그렇더라도 변치 않는 명제(Thesis)가 있다. 사실을 왜곡하거나 꾸미거나 과장하거나 덜어내지 않는 것이다.
영국 맨체스터 가디언(현재의 Guardian)의 에디터였던 찰스 P. 스콧은 1921년 창간 100주년 관련 에세이를 통해 신문의 역할에 대한 의견을 밝힌다. 정확한 보도야말로 신문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의견은 자유롭다. 그러나 사실은 신성하다(Comment is free, but facts are sacred)”는 명제와 함께.
신문이 현실 역사의 기록이라는 측면에서 ‘신성한 사실’은 역사가에게도 매우 기본적인 태도이다. 그래서 카 역시 “역사를 공부하려면 먼저 역사가를 깊이 공부하라”고 조언한다. 역사를 기술한 사람을 알아야 그가 기록하고 서술한 역사의 ‘가치판단과 해석’을 통해 ‘실체적 사실(史實)’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金富軾)의 경우를 보자. 그의 개인적인 욕망과 인품을 알아야 삼국사기에 담긴 ‘사실’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과연 배달민족의 뿌리가 만주벌판에서 발원해 한반도를 아우른 것인지, 아니면 한반도에 국한된 것인지가 그렇다.
요즘 뜨겁게 운위되고 있는 ‘한사군(漢四郡)’의 위치도 이른바 민족사관과 식민사관 관점에 따라 극명하게 다르다. 민족사관은 한사군이 랴오허(遼河)에 위치해 있다고 보지만, 식민사관은 한반도 내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낙랑군은 대동강변 지금의 평양에 위치했다고 본다. 이런 시각 차이 때문에 과거 학력고사와 예비고사 시절 국사시험에 빠지지 않고 나왔던 낙랑-진번-임둔-현도의 위치 문제가 작금의 수능시험에는 나오지 않게 됐다.
우리나라에서 우리의 역사도 이렇게 관점에 따라 극명하게 갈린다. 중세 고려시대를 보자. 고려 의종 때 ‘정중부의 난’이 일어난다. 이후 임유무에 이르기까지 1백년을 ‘무신(武臣)’들이 권력을 장악한다. 제3공화국 이전까지만 해도 역사 교과서는 이를 ‘무신난’으로 정리하고, 한 두 페이지로 소개했다. 그러던 것이 ‘무인정권시대’로 명명되면서 매우 중요하게 다뤄졌고, 분량도 엄청나게 늘었다. 이는 아마도 현대의 무인정권이 과거의 무인정권에 보내는 동병상련 혹은 동지적 일체감이었을까.
하물며 현대사이랴. 우리 헌법이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고 돼 있지만, 일부에서는 이를 부정하려 시도한다. 이는 대한민국의 정체성과도 관련된 매우 심대하고 중대한 사안이다.
사실 요즘의 역사기술은 과거 왕조중심 정치사에서 문화사 및 사회경제사로 확산하는 추세이다. 태정태세문단세…로 시작되는 군왕과 대통령, 그리고 제도와 변란만으로 우리의 역사를 기술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동시대의 자잘한 일상생활이 오히려 역사의 속살을 제대로 보여주기도 한다. 그래서 최근 거시사(巨視史)보다 미시사(微視史)를 연구하는 추세도 나타났다. 자칫 대로변의 건물만 보고 그 이면의 삶을 놓쳐서는 제대로 도시를 알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여하튼 세월은 역사의 바탕일 뿐, 세월 자체가 역사는 아니다. 세월이 역사가 되기 위해서는 시대인식이란 ‘역사적 사유’가 개입돼야 한다. 조선의 박장현은 구사학론(舊史學論)에서 ‘사학은 국민의 밝은 거울이며,사상 진보의 원천’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이는 오롯이 역사가들의 몫이다.
요즘 국정교과서 논쟁이 일고 있다. 역사를 하나의 관점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에서는 적극 검토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카는 말했다. “역사를 공부하려면 역사가를 알아야 한다”고.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미래의 역사학도는 이렇게 말할 지 모른다. “역사를 공부하려면 정치인을 알아야 한다”고.
[더팩트ㅣ박종권 편집위원 sseoul@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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