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타이밍(timing)’이다. 때가 맞아야 하는 것이다. 현존하는 삼라만상(森羅萬象)은 모두가 때를 잘 포착한 결과이다. 공룡은 너무 일찍 6500만년 전에 나타나는 바람에 멸종됐다. 포유류는 이 ‘K-T대멸종’ 이후에 번성할 수 있었다. 기회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기회가 화살같이 스치며 지나갈 때 손을 너무 일찍 뻗으면 화살촉에 관통돼 피만 흘린다. 늦으면 허공을 잡을 뿐이다.
지혜의 왕이라는 솔로몬(Solomon)도 ‘전도서’에서 말한다. 지켜보니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더라는 것이다. 날 때와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와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 심은 것을 뽑을 때 너무 서두르면 쭉정이를 수확할 뿐이요, 늦으면 참새의 만찬이 끝난 찌꺼기뿐이다. 그렇다고 빨리 자라도록 이삭을 당겨 뽑으면 바로 ‘조장(助長)’이다.
그는 덧붙인다. 지킬 때와 버릴 때가 있고, 찢을 때와 꿰맬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와 미워할 때가 있고, 전쟁할 때와 화평할 때가 있다고. 이렇게 모든 것이 ‘때’가 있다. 그런데 울 때 웃고, 슬퍼할 때 춤추면 ‘실성(失性)’했다고 한다. 이는 기회를 놓쳤다는 뜻의 ‘실기(失機)’와도 맥이 닿는다.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바둑은 본디 균형과 조화를 추구한다. 그런데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서는 ‘타이밍’의 게임이다. 첫 수를 둘 때부터 돌을 던지거나 집을 셀 때까지 모든 것이 ‘타이밍’이다. 옛적에는 ‘기다림의 미학(美學)’이라 했지만, 요즘은 ‘속도의 미학’쯤이 돼버렸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 것이다.
어제(7월 26일) 서울 홍익동 한국기원에서 ‘조조대국’이 벌어졌다. 정확히는 ‘曺(조훈현)-趙(조치훈)對局‘이다. 현대바둑 70주년 기념차원으로 주선한 대국인데, 결론부터 말하면 ‘타이밍이 가른 승부’였다. 조치훈 명인(名人)의 흑(黑)번으로 시작했는데, 154수만에 끝이 났다. 초읽기에 몰린 조 명인이 제한된 시간 내에 착점(着點)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시간패(敗)’가 선언됐다.
예전에는 바둑 한 판을 며칠씩 걸려 두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이틀, 하루로 줄어들다가 개인별로 10시간, 7시간, 5시간, 4시간으로 갈수록 짧아졌다. 이번 ‘조조대국’ 규정은 제한시간 1시간에 40초 초읽기가 3회였다. 초읽기에 들어가면 계시원이 마지막 10초를 “하나, 둘, 셋~아홉, 열”하고 센다. 그런데 조치훈은 마지막 초읽기에서 “열” 소리와 동시에 착점한 것이다. 보통은 아무리 늦어도 “아홉” 소리에 착점한다. 규정상 “열” 소리와 동시 착점은 시간을 넘긴 것으로 본다. 즉, 금(禁)을 밟은 것이다.
당시 국면은 조치훈이 약간 우세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승부는 승부. 조치훈은 패전을 기록했다. 조훈현은 “조치훈이 승부는 져주고 바둑은 이겼다”고 했지만, 얼마나 위로가 됐을지는 글쎄다. 월드컵 결승에서 “경기에는 이겼으나 승부에서는 졌다”는 말이나, 정치인이 “선거에서 이겼으나 표(표)에서 졌다”는 말과 다름이 없는 말이 아닐까. 본인도 이날의 “열” 소리가 나중에 가장 기억에 남을 것 같다고 했다. 여하튼 승부는 승부이고, 진 것은 진 것이다.
예전 바둑은 ‘신선놀음’이었다. 한 판의 대국에도 ‘도끼자루가 썩을’ 정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면서 361팩토리알이란 경우의 수(數)에서 최선의 수(手)를 궁구(窮究)하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기도(碁道)라 했다. 하지만 TV시대가 되고 나서는 도끼가 썩는 시간이 아닌, 도끼를 내려치는 찰나의 시간에 착수를 마쳐야 한다. 기도(碁道)는커녕 잘 봐줘도 아트(art)의 기예(碁藝)쯤으로, 어쩌면 테크닉의 기술(碁術)이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이는 시간뿐만 아니라 바둑 팬들도 느긋하게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어디 바둑뿐이랴. 세상 모든 것이 시간 싸움, 즉 ‘타이밍 워(Timing War)’ 시대이다. 기업의 수명주기도 10분의 1로 짧아졌다. 몇 년 전만 해도 투자회사들은 “멀리 30년을 내다보고, 최소한 10년을 내다보고 투자하라”고 권유했다. 소위 장기투자이다. 요즘 이런 말을 하면 십중팔구 “돌았다”거나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월가(街)에서 여의도 증권가까지 “3년 앞을 가늠할 수 없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러다 보니 기업의 생존방식도 달라졌다. 과거에는 목표를 향해 매진했다면, 지금은 생존을 위해 임기응변한다. 불과 수년 전 기업인 조찬모임 단골 주제가 “닌텐도에서 배우자”는 것이었다. 게임 하나로 성공한 세계 최대의 콘솔형 게임회사가 아닌가. 역시 한 우물을 파는 뚝심, 일본말로 ‘곤죠(根性)’의 승리다.
그런데 “닌텐도에서 배우자”는 강연은 그로부터 1년이 지나지 않아 제목은 그대로인데, 내용은 정반대가 됐다. ‘닌텐도 성공’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닌텐도 실패’에서 배우자는 것이다. 닌텐도의 적(敵)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곳에서 급습해 왔다. 바로 아이폰이다. 전화기가 게임기 역할까지 가로챈 것이다. 콘솔도, TV수상기도, 심지어 선(線)도 필요 없다. 언제 어디서든 게임이 가능한 것이다.
필름시장을 석권했던 코닥은 사라졌지만, 후지필름은 디지털 영상처리 쪽으로 임기응변하면서 살아남았다. 보급형 카메라 시장은 한때 니콘이 주름잡았으나, 디지털 시대에는 캐논이 발 빠르게 대처했다. 역시 1등은 변화에 늦게 대응한다. 그래서 3등에게도 기회가 오는 것이다.
경 영학에 ‘빅3의 법칙’이 있다. 동종업계에서 빅3만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나머지는 도태할 운명이다. 여기서 1등은 표준을 만들고, 2등은 베끼며, 3등은 변화를 모색하는 식으로 경쟁한다. 1등은 연구개발을 통해 특허와 표준화로 2등 3등 기업들의 추월을 견제한다. 2등은 연구개발비용을 아끼면서 시장에서 가격으로 경쟁한다.
그런데 이 표준이 바뀌는 것이다. 닌텐도의 경쟁사가 아이폰의 애플이 되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경기장과 경기 규칙이 바뀌면 3등에게 기회가 온다. 항상 다른 기회를 엿보면서 임기응변의 체질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거함인 1등은 침로변경이 매우 더디다. 그러나 소형선박인 3등은 잽싸게 방향타를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타이밍 전쟁’이 어디 기업뿐이랴. 개인도,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기업의 수명주기가 크게 줄었다면, 이제 안정된 직장은 없다는 말이다. 직장이 아니라 ‘직업’과 ‘직역’이 관건이다. 대기업이란 거함에 승선했다는 안도감으로 열심히 일하지만, 배가 기우는 것은 갑판 위 선장과 기관사만 안다. 그들은 절대 퇴선(退船)명령을 내리지 않는다. 마지막 순간까지 갑판 아래 봉급쟁이는 “가만히 있으라” “더욱 열심히 일하라”는 명령밖에 듣지 못한다. “거함이 설마” 하다가 자칫 배를 옮겨 탈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국가의 경우는 말 할 것도 없다. 외교든 내치(內治)든 때를 놓치면 회복하기 어려운 부담을 전 국민에게 안긴다. 뿐만 아니라 후세에까지 부담을 준다. 문제는 당장 눈앞에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차기 정권에 ‘수건’을 돌리거나, “공과(功過)는 역사가 심판할 것”이라며 당당하기까지 하다.
타이밍과 관련한 두 경구를 보자. 먼저 바둑의 ‘신물경속(愼勿輕速)’이다. 서두르지 말고 신중하게 두라는 뜻이다. 그런데 조치훈의 경우 너무 신중하다가 ‘타이밍’을 놓쳤다. 이미 1시간짜리 대국방식으로 달라진 경기라면 오히려 가볍고(輕) 빠른(速) 반상(盤上)의 운영에 승부의 추가 기울지 않겠는가.
다음은 손자병법의 ‘병문졸속(兵聞拙速)’이다. 졸속행정, 졸속입법 등의 졸속 어원이다. 졸속(拙速)의 뜻은 ‘서투르면서 빠르다’쯤인데, 위 예문에서 보듯이 뭔가 바람직하지 않은 의미로 쓰인다. 그런데 손자가 말한 ‘졸속’은 비록 서투르고 졸렬하더라도 빠른 것이 좋다는 뜻이다.
‘졸속’의 반대는 ‘교구(巧久)’로 ‘교묘하고 훌륭하게 오래 끈다’는 뜻이다. 손자(孫子)는 용병할 때 좀 졸렬해도 빠른 것이 좋고, 비록 훌륭한 대처로 이긴다고 할지라도 오래 끄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전쟁의 요체를 짚은 것이다. 이는 전쟁에는 비용과 인력이 많이 소모되는데, 이긴다 하더라도 오래 끌면 가용자원이 소진돼 결국 누군가에 먹히는 ‘어부지리(漁父之利)’ 상황이 된다는 통찰이다.
졸속(拙速)과 교구(巧久)의 대비에서 도덕경의 ‘대교약졸(大巧若拙)’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훌륭한 기교는 오히려 졸렬해 보인다”는 것인데, 여기에 빠름(速)과 오램(久)에 따라 전체적 쓰임새가 갈렸다. 어찌 보면 “매우 인위적인 교(巧)라 해봐야 자연 그대로의 졸(拙)쯤이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여하튼 전쟁의 역사에서 찬사를 받는 작전을 보면 모두가 전격전(Blitzkrieg)의 속전속결이다. 알렉산더의 가우가멜라 전투가 그랬고, 2차대전 때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그랬다. 반대로 미국과 베트남 전쟁은 20년을 끌었고, 서로 천문학적인 피해를 입었다.
결국 속도이고 ‘타이밍’이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광속(光速)의 시대에 살아남는 방법은 ‘기회를 맞아 변화로 응하는 것(臨機應變)’이다. 무엇보다 때를 놓치지 않는 것이다.
강태공은 세월을 낚은 것이 아니라 절묘한 ‘타이밍’을 기다린 것이다. 물론 산(山)이 오지 않으면 스스로 산(山)으로 가는 것도, 산(山)을 옮기는 것도 ‘기적’일 테고.
[더팩트ㅣ박종권 편집위원 sseoul@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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