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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권의 술자리 인문학] '자유와 평등'의 필요조건은 '똘레랑스'

  • 정치 | 2015-07-06 12:03
투표로 구성하는 정부조직의 평등 우리가 목표하는 자유와 평등도 적절한 견제와 균형이 무너지면 곧바로 황폐해질 수 있다. 이를 지키는 것은 공존의 지혜, 곧 관용이며 똘레랑스이다./임영무 기자
투표로 구성하는 정부조직의 평등 우리가 목표하는 자유와 평등도 적절한 견제와 균형이 무너지면 곧바로 황폐해질 수 있다. 이를 지키는 것은 공존의 지혜, 곧 관용이며 똘레랑스이다./임영무 기자

역사의 물줄기는 작은 돌기에도 문득 방향을 바꾼다. 당시에는 모른다. 그토록 미미한 저항이 도도한 흐름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7월 4일은 미국의 독립기념일이다. 시작은 '보스톤 차(茶)사건'으로 명명된 꿈틀거리는 수준의 작은 몸짓이었다. 당시 영국은 아메리카 식민지 정착민에 세금을 거두었다. 중국과 스리랑카를 통해 들여온 차(茶)였다. 동인도회사는 유통마진을, 영국정부는 세수입을 올렸던 것이다.

그런데 새뮤얼 애담스가 '작은 몸짓'을 시작한다. "대표권 없으면 세금도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 영국 식민지 주둔군은 강하게 압박했으나, 정착민들은 화물선 다트머스호(號)를 습격해 선적된 차(茶)상자를 바다에 버린다. 현재 가치로는 150만 달러, 15억 원어치쯤이다.

그로부터 8년간에 걸친 독립전쟁 끝에 13개 주(州)가 독립한다. 역사의 시침을 돌려 만일 영국정부가 식민지에 적당한 대표권을 줬더라면? 세금정책을 좀 더 완화했더라면? 역사에 가정(假定)은 무의미하다지만, 설령 가정대로라도 미국의 독립은 완급(緩急)의 문제일 뿐이었다고 본다. 왜냐? 문제는 세금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이었기 때문이다.

1776년에 작성된 미국의 독립선언문을 보자.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조물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인류는 정부를 조직하였다"고 명시하고 있다. 즉, 절대왕정에 대한 저항권과 인민 주권을 담았던 것이다.

이로부터 13년이 지나 1789년 프랑스에 혁명이 일어난다. 이 역시 세금으로 촉발됐다. 다만 조세저항의 주체는 일반인이 아니라 자산가인 귀족들이었다. 결국 국고(國庫)는 텅 비고, 일반인의 삶은 한계상황에 몰렸다. "빵을 달라"는 외침에 앙트와네트 왕비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않으냐"고 했다는 설(說)은 자극적이며 선동적이다.

군중들은 바스티유 감옥으로 몰려간다. 당시 죄수는 7명 뿐, 정치범은 없었다. 다만 무기가 보관돼 있었다. 군중들은 이 무기를 노렸다. 바스티유 책임자는 부엌칼로 참수된다. 100만명이 넘는 '피의 제전'이 시작된 것이다. 목표는 절대왕정의 붕괴였다. 혁명의 기치는 '자유, 평등, 박애'였다. 미국의 독립선언과 맥(脈)을 같이하는 존 로크의 '사회계약' 사상이다.

삼권분립 평등권의 출발은 개개인의 투표권이다. 그 종착점은 투표로 구성하는 정부조직의 평등, 즉 '견제와 균형'이다./더팩트 DB
삼권분립 평등권의 출발은 개개인의 투표권이다. 그 종착점은 투표로 구성하는 정부조직의 평등, 즉 '견제와 균형'이다./더팩트 DB

절대왕정 시대에는 계급만 있고, 평등은 없었다. 먹고 입고 자는 것만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죽고 죽이는 것도 달랐다. 프랑스 대혁명의 발명품 '기요틴(단두대)'의 첫 희생자는 루이16세였다. 이후 왕이든, 귀족이든, 평민이든 똑같은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다. 프랑스 대혁명 이념인 '평등'은 죽이는 수단에서 먼저 이뤄졌다.

과거 중국도 귀족과 평민은 죽이는 수단이 달랐다. TV드라마 '판관 포청천'에서 주인공은 사형을 언도할 때 "작두를 대령하라"고 한다. 그런데 평민은 '개작두', 왕족은 '용작두'이다. 작두의 머리를 각각 개와 용으로 장식한 것인데, 목을 자르는 예리함은 똑같았다. 그럼에도 굳이 차별을 두었던 것이다.

이렇게 '쟁취'한 자유와 평등이지만, 사회가 어디 그렇게 하루아침에 변하던가. 중국 쓰촨(四川)의 변검(變瞼)도 아니고. 민주주의의 대명사 미국도 독립하면서 '1인1표제'를 실시했지만, 모두에게 적용된 것은 아니다. 영어로 'One man, one vote'인데, 말 그대로 남자(man)에게만 투표권을 주었다. 여기에 여자(woman)가 참여하기까지는 150여년이 걸려 1920년에야 가능해졌다.

흑인은 이보다 더 걸렸다. 문맹과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사실상 투표권이 제한됐던 것이다. 마틴 루터 킹이 1965년3월7일 '셀마의 행진'을 시작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킹 목사와 지지자 600여명이 앨라배마주(州) 셀마에서 주도(州都)인 몽고메리까지 행진하다 무자비하게 진압된다. '피의 일요일'이다. 결국 린든 존슨 대통령이 흑인 투표권법에 서명하면서 비로소 '평등'이 이뤄진다.

대한민국이 1948년 제헌헌법을 통해 '1인1표'를 실시했던 것보다 한참 늦게 '완전한 평등'이 이뤄진 것이다. 우리는 그만큼 자부심을 가져도 될까. 어쩌면 당시 하지 군정(軍政)의 입장에선 미국헌법과 비슷해 굳이 비토할 이유가 없었고, 우리로서는 '단일민족'이었기 때문에 '흑인차별' 같은 갈등을 피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이 평등권의 출발은 개개인의 투표권이다. 그 종착점은 투표로 구성하는 정부조직의 평등, 즉 '견제와 균형'이다. 미국 독립선언문을 다시 보면,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조물주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추구권 등을 부여했으며,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정부를 조직한다"는 선언이다. 정부 조직의 구성 이유이다.

바로 여기에서 '삼권분립'이 나온다. 민주주의가 저항한 절대왕정은 한마디로 권력의 집중이다. 집중된 권력은 그 속성상 '평등'을 거부한다. 3권이 집중됐든, 2권이 집중됐든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그래서 솥발(鼎立) 같은 권력의 균형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 목표는 소위 위정자들의 행복이 아니라, 시민들의 자유와 평등과 행복추구를 위해서이다.

'똘레랑스' 설령 확실하게 내가 옳더라도, 밀어붙이는 것보다 상대가 수긍하는 것이 더욱 힘을 받을 테니까 관용(寬容)하는 것이다. 관용은 말 그대로 톡 쏘는 무서운 얼굴이 아니라, 너그러운 얼굴이란 뜻이다./임영무 기자
'똘레랑스' 설령 확실하게 내가 옳더라도, 밀어붙이는 것보다 상대가 수긍하는 것이 더욱 힘을 받을 테니까 관용(寬容)하는 것이다. 관용은 말 그대로 톡 쏘는 무서운 얼굴이 아니라, 너그러운 얼굴이란 뜻이다./임영무 기자

그런데 이 '자유와 평등'을 구현하고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가 있다. 프랑스 대혁명의 이념에 들어있는 '박애'이다. 너그럽게 모두를, 특히 상대방을 포용한다는 뜻이다. 나나 우리나 모두 상대가 있다. 이 상대를 인정하고 또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자유와 평등'을 구현할 수 없다는 깊은 깨달음이다.

요즘 말로 하면 '똘레랑스(Tolerance)'이다. 좀 불편하고, 거북하며, 마음에 들지 않지만, 참는 것이다. 항상 내가 옳을 수는 없을 테니까, 상대도 스스로 의(義)를 향해 선(善)을 행한다고 믿을 테니까. 설령 확실하게 내가 옳더라도, 밀어붙이는 것보다 상대가 수긍하는 것이 더욱 힘을 받을 테니까 관용(寬容)하는 것이다. 관용은 말 그대로 톡 쏘는 무서운 얼굴이 아니라, 너그러운 얼굴이란 뜻이다.

산 꼭대기에서 아래 목표를 향해 바위를 굴려 내리지만, 적중(的中)시키기가 쉽지 않다.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나무와 작은 바위와 경사 등 진로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부지기수다. 높은 산이라면 더욱 그렇다. 대부분 빗나가기 일쑤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도달할 수도 있다. 설혹 도달하더라도 당초에 목표했던 것과 다른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알래스카 삼림이 우거진 것은 곰들이 연어를 먹기 때문이란다. 먹고 남은 연어를 숲 이곳 저곳에 유기(遺棄)하는데, 이 사체가 썩으면서(분해되면서) 토양에 질소를 제공하고, 이 질소가 나무의 자양분이 되며, 벌과 나비와 새와 작은 설치류까지 모여 생태계를 이룬다는 것이다. 곰이 식성이 변해 연어를 먹지 않으면, 알래스카는 다시 황폐해 질 수 있다는 연구다.

미국에서는 한때 옐로스톤의 환경보호를 위해 최고의 포식자인 늑대를 사냥해 씨를 말렸다. 그러자 들소와 영양의 개체수가 늘었고, 이들이 닥치는 대로 풀과 관목을 먹어 치우면서 자연환경이 오히려 황폐해졌다. 이에 늑대를 방사하자, 옐로우스톤의 삼림이 다시 우거지기 시작했다.

생태계란 그런 것이다. 우리가 목표하는 자유와 평등도 적절한 견제와 균형이 무너지면 곧바로 황폐해질 수 있다. 이를 지키는 것은 공존의 지혜, 곧 관용이며 똘레랑스이다. 바로 행복의 필요조건이다.

[더팩트ㅣ박종권 편집위원 sseoul@tf.co.kr]

'똘레랑스' 설령 확실하게 내가 옳더라도, 밀어붙이는 것보다 상대가 수긍하는 것이 더욱 힘을 받을 테니까 관용(寬容)하는 것이다. 관용은 말 그대로 톡 쏘는 무서운 얼굴이 아니라, 너그러운 얼굴이란 뜻이다./임영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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