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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권의 술자리 인문학] '정치는 허업'인데 재벌은 여전하다

  • 정치 | 2015-03-09 11:23

"정치는 허업"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지난달 22일 아내 고 박영옥 여사 빈소에서 정치 후배들에게 "정치는 허업"이라고 조언했다./배정한 기자

“정치는 ‘허업(虛業)’이다.” 그러나 재물은 귀신도 부린다. ‘한 정권은 가고 한 정권은 오되 재벌은 여전히 있도다.’ 얼마 전 상배(喪配)한 현대 한국정치사의 풍운아인 김종필 씨가 화두를 하나 던졌다. “정치는 허업(虛業)이다.” 그는 ‘영원한 2인자’로 불리지만, 히말라야 등반에서 에베레스트산만 동경의 대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산악인들에게는 K2가 매력적이라고 한다.

그는 힘들게 올라가 정상에 섰기 때문에 ‘정치는 허업’임을 안다. 목숨을 건 쿠데타와 권력의 쟁취, ‘자의반타의반’ 외유, 한때 부하였던 신 군부 쿠데타세력에 재산이 몰수됐다가 DJP로 복귀했던 오뚝이가 아닌가. 바로 그가 ‘허업’임을 말하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것이다. 산악열차 타고 알프스 융프라우쯤 올라 “야호~” 한번 내지른 깜냥으로 ‘허업’을 말했다면 ‘허언(虛言)’로 치부됐을 것이다.

구약성서의 전도서 주인공으로 알려진 지혜의 왕 솔로몬도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는 깨달음을 전하고 있다. 그가 스스로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다”고 자랑(?)할 정도로 권력과 권세를 누릴 만큼 누렸다. 그런 그이기에 “모든 것이 다 헛되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주역도 항룡유회(亢龍有悔)라 했다. 하늘 끝까지 올라간 용은 내려갈 일밖에 없는 법이다. 그럼에도 모든 잠룡(潛龍)은 항룡(亢龍)을 추구한다. 직접 겪어봐야 아는 것일까. ‘젊은이는 쉽게 늙고 배움을 이루기 어려우니, 짧은 시간도 헛되이 말라’는 주자(朱子)의 가르침도 늙어봐야 탄식으로 깨닫고, 호호탕탕 흘러가던 장강(長江)도 바다에 이르러서야 황진이가 왜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고 했는지 가슴을 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권력에의 의지’가 있다고 하는데, 그러면 과연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여기서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의 미묘한 가르침을 한번 감상해 보자.

지난 3월 7일 19기(忌)를 맞은 요절한 시인 기형도는 ‘질투는 나의 힘’이라고 했다.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맨 생에서,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라는 다소 난해한 시이다. 굳이 대구(對句)식으로 하자면 사마천은 ‘분노는 나의 힘’이라고 했다. 친구인 이릉을 변호하다 궁형을 받은 그는 “이것이 내 죄인가? 이것이 정녕 내 죄란 말인가? 몸이 망가져 쓸모 없게 되었다”고 탄식한다.

사마천의 가르침 사기열전을 관통하는 하나의 씨줄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바로 ‘정치(권력)는 허업’이라는 것이다./유튜브 영상 갈무리
사마천의 가르침 사기열전을 관통하는 하나의 씨줄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바로 ‘정치(권력)는 허업’이라는 것이다./유튜브 영상 갈무리

그가 사기열전의 첫머리에 백이를 들고 “살인과 강도를 일삼은 도척은 천수를 누리고, 착하고 고결한 백이와 숙제는 굶어 죽었으니 소위 천도(天道)는 옳은가 아닌가”라고 되묻는데, 이는 바로 자신의 억울함과 분노를 빗대어 표출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궁형(宮刑)을 받은 그는 깊이 생각한 끝에 깨닫는다. “서백(西伯)은 갇힌 몸으로 주역을 풀이했고, 공자(孔子)는 군왕들이 알아주지 않고 고난을 겪게 되어 춘추를 지었으며, 굴원(屈原)은 쫓겨나 이소를 지었고, 좌구명(左丘明)은 눈이 멀어 국어를 남겼다. 손자(孫子)는 다리를 잘리고서 병법을 논했고, 여불위(呂不韋)는 좌천돼 여씨춘추를 전했으며, 한비(韓非)는 진나라에 갇혀 세난과 고분을 남겼다. 시경 300편은 대체로 현인과 성인이 발분하여 지은 것인데, 모두 마음 속에 울분이 맺혀 있지만 그것을 발산할 수 없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서술하여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생각한 것이다”라고.

그런 그가 열전에서 내세운 인물들은 대부분 ‘권력의 정점에 섰으나 비참하게 마감한’ 영웅호걸들이다. 백이(伯夷)야 불사이군(不事二君)이란 명분으로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다지만, 진시황을 도와 중국을 통일한 이사(李斯)는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조고(趙高)에 죽임을 당하고, 진(秦)나라에 법치의 기초를 닦았던 상앙(商鞅)은 자신의 법에 따라 거열형에 처해지며,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주역 오(吳)의 부차(夫差)에게 승리를 안겼던 오자서(伍子胥)는 말가죽에 싸여 물고기밥이 되지 않았던가. 이처럼 사기열전을 관통하는 하나의 씨줄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바로 ‘정치(권력)는 허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70편 열전(列傳)에서 스스로를 이야기한 마지막 ‘태사공자서’를 빼면 사실상 대단원인 69번째는 ‘화식(貨殖)’을 다룬다. 화(貨)는 재화(財貨)를, 식(殖)은 불어난다는 증식(增殖)을 뜻한다. 즉 재산을 늘린 거부(巨富)에 대한 이야기다. 지금으로 치면 ‘재벌열전’쯤이다. 선비의 고매, 식자의 웅지, 영웅의 기개, 협객의 기상을 다루던 사마천이 웬 재벌타령인가. 어쩌면 그가 가장 닮고 싶었고, 부러웠던 사람들일까.

우선 그는 “천금을 가진 부잣집 아들은 저잣거리에서 죽지 않는다”며 배금(拜金)주의의 일단을 내비친다. “백성은 상대방의 재산이 자기보다 열 배 많으면 몸을 낮추고, 백 배 많으면 두려워하며, 천 배 많으면 그의 일을 해주고, 만 배 많으면 그 하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부자를 꿈꾸는데, 농부는 양식을 생산하고, 어부와 사냥꾼은 자재를 공급하고, 장인은 물건을 만들고, 상인은 유통시킴으로써 부(富)를 쌓는다고 봤다. ‘군자(君子)는 포만(飽滿)을 구하지 않는다’고 하니 사농공상(士農工商)에서 선비만 뺀 나머지 요소들이다. 이 요소의 근원이 크면 부유해지고, 작으면 가난해진다고 했다.

'보이지 않는 손' 진심을 다하면 큰 돈을 벌게 될까. 사마천은 짐짓 '보이지 않는 손'을 거론한다./더팩트DB
'보이지 않는 손' 진심을 다하면 큰 돈을 벌게 될까. 사마천은 짐짓 '보이지 않는 손'을 거론한다./더팩트DB

특히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깨달음을 일찍이 간파했다. “부자가 되는 데는 정해진 직업이 없고, 재물에는 정해진 주인이 없다”면서 농사·도굴·도박·행상·술장사·대장장이·식당·수의사로 재벌급의 부를 쌓은 인물들을 소개한다. 모두 한 가지 일에 전심한 사람들이다. 그 중에서도 큰 부자가 되는 첩경은 상업이라 했다. “부자가 되는 길에는 농업이 공업에, 공업이 상업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한가지 일에 전심을 다하면 큰 돈을 벌게 될까. 그는 짐짓 ‘보이지 않는 손’을 거론한다. “물건 값이 싸다는 것은 장차 비싸질 조짐이며, 값이 비싸다는 것은 싸질 조짐이다. 각자가 그 생업에 힘쓰고 즐겁게 일하는 것이 마치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과 같아서 물건은 부르지 않아도 밤낮으로 쉴 새 없이 절로 모여들고, 구하지 않아도 백성이 만들어 낸다.”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 바로 시장경제이다. 사마천은 이것이 도(道)에 부합하고, 자연법칙의 징험이라고 했다.

자연법칙은 시세변동에 따라 자연스럽게 취하는 시세차익을 말한다. 예컨대 “사람들이 버리고 돌아보지 않을 때 사들이고, 사람들이 사들일 때 판다. 풍년이 들면 곡식은 사들이고, 실과 옷은 판다. 흉년이 들어 누에고치가 나돌면 비단과 풀솜을 사들이고, 곡식을 내다 판다”는 것이다. 바로 사업가의 원조이자 재벌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주나라 시대 백규(白圭)의 이야기이다. 그는 임기응변과 결단력과 신용과 집념을 성공비결로 꼽았다. ‘사업은 마치 이윤과 여상이 계책을 꾀하고, 손자와 오자가 군사를 쓰고, 상앙이 법을 시행하는 것같이 해야 한다”고 말한다.

뭔가 그럴 듯하면서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시세변동을 살피는 자연법칙이라고 하지만, 바로 요즘 세상에선 금지된 ‘독점(獨占)과 ‘매점매석(買占賣惜)이 아닌가. 사마천이 아마도 가장 닮고 싶었던 인물이 부와 미녀(西施)를 함께 취한 범려(范蠡)인 듯하다. 오월쟁패(吳越爭覇)에서 월왕 구천(句踐)이 승리하자 ‘토사구팽(兎死狗烹)’을 내다보고 달아나 나중에 유통의 중심인 도(陶)에 가서 주공(朱公)으로 칭했다. 그는 “장사를 하며 물자를 쌓아 두었다가 시세의 흐름을 보아 내다 팔아서 이익을 거두었다”고 했다. 이로써 19년동안 세 차례 천금을 벌었다니 그야말로 매점매석의 달인이라고 할 수밖에. 나중에 늙고 쇠약해지자 전문 경영인이 아닌 자손들에게 일을 맡겼고, 자손들이 가업을 잘 운영해 만금(萬金)의 부자가 됐다고 한다. 딱 요즘의 재벌이다.

사마천도 “예로부터 천금의 부자는 한 도읍의 군주에 맞먹고, 만금의 부자는 왕과 즐거움을 함께 한다”며 “이들이야말로 소봉(素封)이 아니냐”고 되묻는다. 소봉은 천자(天子)로부터 받은 봉토는 없으나 재산이 많아 제후와 비할만한 큰 부자로서 봉지나 작위가 없는 봉군(封君)을 뜻한다. 즉, 열전(列傳)의 인물들을 살펴봤지만 뭐니뭐니해도 역시 ‘소봉(재벌)이 제일’이라는 뜻으로 읽혀지는 것은 필자가 속물이어서일까.

기업의 성공요인은? 최근 전자결제 회사인 페이팔(PayPal) 창업자 피터 힐이 내한 강연을 가졌는데, 요지는 ‘경쟁이 아니라 독점이 기업의 성공 요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구글(Google)을 예로 들었다./구글 사이트 갈무리
기업의 성공요인은? 최근 전자결제 회사인 페이팔(PayPal) 창업자 피터 힐이 내한 강연을 가졌는데, 요지는 ‘경쟁이 아니라 독점이 기업의 성공 요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구글(Google)을 예로 들었다./구글 사이트 갈무리

아마도 사마천이 요즘 세상에 태어난다면 재벌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백리 먼 곳에 나가 땔나무 장사를 하지 말며, 천리 먼 곳에 나가 양식을 팔지 말라’고 했는데, 에너지(땔나무)를 구하기 위해 지구 반 바퀴를 돌고 곡물(양식)을 구하기 위해 세계를 누비는 시대가 아닌가. 게다가 독점과 매점매석이 법적 사회적으로 제재대상이니 원천적으로 도주공(陶朱公) 같은 재벌은 불가능하다. 그럴까?

매점매석은 몰라도 독점은 다르다. 최근 전자결제 회사인 페이팔(PayPal) 창업자 피터 힐이 내한 강연을 가졌는데, 요지는 ‘경쟁이 아니라 독점이 기업의 성공 요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구글(Google)을 예로 들었다. 검색 엔진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으면서도, 그로써 엄청난 수익을 올리면서도 마치 독점이 아닌 듯이 위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휴대폰 운영체제(OS) 안드로이드로 애플(Apple)과, 무인자동차 시스템으로 세계적 자동차회사들과, 이런저런 첨단정보기술 제품으로 IT업계와 경쟁하는 것처럼 위장한다는 것이다. 결국 구글 창업자들은 독보적이고 독점적인 검색으로 세계적인 재벌이 됐다는 것이다. 물론 자신도 마찬가지이고.

그는 톨스토이의 장편 ‘안나 카레리나’의 첫 구절도 비틀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한데,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각’이라는 대목을 ‘실패한 기업은 모두 엇비슷한데, 성공한 기업은 성공한 이유가 제각각’이라고 했다. 완전경쟁에서 기업은 돈을 벌 수가 없고, 독점적인 상황에서만 큰 이윤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경쟁은 패자를 위한 것(Competition is for Losers!)’이라 목소리를 높였다.

필자도 피터 힐처럼 솔로몬 왕의 전도서 한 구절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를 비틀어 보겠다. “한 정권은 가고 한 정권은 오되 재벌은 여전히 있도다.”

'부자병' 우리나라도 이미 ‘부자병(病)’에 걸렸다. 최근 여론보사에서 국민들은 '우리나라의 시급한 해결과제'로 '빈부격차 해소(28.1%)'를 첫손에 꼽았다.
'부자병' 우리나라도 이미 ‘부자병(病)’에 걸렸다. 최근 여론보사에서 국민들은 '우리나라의 시급한 해결과제'로 '빈부격차 해소(28.1%)'를 첫손에 꼽았다.

그렇다. 우리나라도 이미 ‘부자병(病)’에 걸렸다. 부자가 돼서가 아니라 부자가 되기 위해 무한 질주하는 병이다. 한때 유행했던 은행 광고 카피도 ‘부자 되세요’가 아니었나. 빈부의 격차 속에 중산층만 얇아졌지만. 개발시대 “잘 살아 보세~”로 시작하는 캠페인은 어떻게 사는 것이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는 것인지 지속적으로 머리에 주입됐다. 바로 ‘초가집 없애고, 마을 길 넓히고, 소득증대 힘쓰는 것’이다. “돈 벌어 부자 되자, 하면 된다”는 교조(敎條)이다.

불쌍한 것은 역시 상업·공업·농업도 아닌 인문학 먹물(士)들인가. 그럴 수밖에 없다. 아는 것이 힘이라지만, 모르는 게 약이라 하지 않던가. “지혜가 많으면 번뇌가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전도서 1장18절)”라고 가르친다. 그나마 먹물의 대명사 교사·교수가 요즘 뜨는 직업으로 각광받는다니 다행인가, 요행인가.

최근 ‘반어직설(反語直說)’이란 신조어가 나왔다. ‘개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격(wag the dog)’은 ‘긴 꼬리(long tail) 법칙’을 갖다 대며 ‘꼬리는 몸통을 흔든다’로 이해한다.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은 ‘서일필태산명동(鼠一匹泰山鳴動)’, ‘쥐 한 마리가 태산을 요동치게 한다’는 뜻이 더 정확하다고 한다. 이럴 때는 물구나무 서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정신건강에도, 육체건강에도 좋을까.

'부자병' 우리나라도 이미 ‘부자병(病)’에 걸렸다. 최근 여론보사에서 국민들은 '우리나라의 시급한 해결과제'로 '빈부격차 해소(28.1%)'를 첫손에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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