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이선화 기자] "더는 가르칠 것이 없다. 이제 하산하거라."
오래된 무협 영화를 보면 무술의 대가와 배움을 갈구하는 주인공이 나온다. 주인공은 스스로 제자가 되어 스승과 동고동락을 하며 설거지, 빨래 등 온갖 잡일을 대가로 무술을 배운다. 주인공이 어느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스승이 직접 졸업시킨다.
"하산하거라" 특별한 절차 없이 이 대사 하나면 오케이. 이를 우리는 '도제식 교육'이라고 부른다.
최근엔 정해진 교육 절차에 따라 학교에 가고 학과를 선택해서 그 분야의 지식을 익히지만, 예전에는 그러지 못했다. 배움이 어려웠던 옛 시대의 사람들은 스승을 찾아 지식을 갈고닦는 것이 쉽고 유일한 방법이었다. 의학, 요리, 음악, 무술, 공예 등 전문분야라면 더욱 더 그렇다. 지금부터 다룰 '탱화'도 마찬가지다.
탱화를 그리는 화가 김송희 불모는 학창 시절 친오빠인 김의식 불화작가를 따라 탱화에 인연을 맺었다. 김의식 작가는 단청 문화재 수리기술자로 제13회 대한민국 불교미술대전 대상과 제18회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 대통령상을 수상한 불교미술의 대가다. 오빠를 스승으로 삼고 탱화를 배운 김송희 불모는 배우자인 전근창 원장을 만나 독립, 이른바 '하산'을 했다. 그렇게 30여 년. 탱화는 그의 일부가 됐다.
화실에는 김송희 불모 부부가 함께 있었다. 전근창 원장 역시 무형문화재 제11호 단청장 이수자이자 문화재 수리 기술자로 김송희 불모의 탱화 작업을 돕는다. 특히 이론에 더 조예가 깊은 전근창 원장에게 자문할 때가 많다. "탱화란 부처님 설법이나 경전 내용을 표현하는 거죠"라고 말하는 전 원장. 탱화는 독창성보다 불교의 교리를 표현하는데 더 중점을 두기 때문에 김송희 불모는 그의 자문이 많은 도움이 된다.
탱화는 크게 상단탱화, 중단탱화, 하단탱화로 구분한다. 상단탱화는 불상을 모신 상단 뒤에 걸어두는 후불탱화를 말하며 중단탱화는 부처상 옆 벽면에 있는 신중탱화를 뜻한다. 후불탱화가 주로 신앙적 성격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면 신중탱화는 수호신적인 기능을 강조하는 편. 하단탱화는 신중탱화의 맞은편에 걸리는 감로탱화와 함께 호랑이를 신격화시킨 산신탱화, 불교의 호법선신을 의인화한 칠성탱 등 모두를 포함한다.
화실에선 크기가 다른 산신탱화, 신중탱화 작업이 한창이었다. 탱화는 작품 크기에 따라 적게는 2~3개월에서부터 길게는 1년 가까이 소요되는데 막바지 작업에 들어간 산신탱화는 그림 그리는 작업만 6개월 이상, 전체 작업은 1년 가까이 걸렸다고 한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탱화작업은 보통 여러 작품을 동시에 진행하지만 요즘은 코로나19로 인해 작업량이 조금 줄어든 편이다.
김송희 불모는 두 개의 붓을 들고 정성스럽게 색을 덧칠했다. 탱화엔 황(黃), 청(靑), 백(白), 적(赤), 흑(黑)의 다섯 가지 색이 사용되는데 이는 음양오행 사상에 기반을 둔 한국의 전통 오방색이다. 작품에는 돌이나 식물에서 얻은 자연 안료를 사용해 고려 불화 형식의 색채를 표현하기도 한다. 색 하나에 역사를 고스란히 담은 셈이다.
색 말고도 탱화에는 숨은 전통이 존재한다. 탱화 작업에 가장 중요한 건 배접. 종이 또는 천을 여러 겹 포개어 붙이는 작업이다. 이렇게 하면 겹겹이 쌓인 종이가 습기를 자체적으로 처리하기 때문에 곰팡이가 생기는 것을 방지한다. 고려 시대 탱화가 지금까지 전해져 올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배접 방식 때문이다. 전근창 원장은 "한지에 면천, 지금 작업 중인 건 4겹 정도 들어간 거예요. 계속 위에다 덧대서 굉장히 두껍죠. 안 그러면 몇 년 못가요. 이런 작업을 안 하면"이라고 말하며 배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작업이 끝난 산신탱화는 색이 번지거나 묻어나지 않도록 위에 한지로 덧댄 다음 조심스럽게 말아서 보관한다. 한지는 알칼리성을 띠고 있는 잿물과 닥나무를 이용해 만들기 때문에 일반 종이와 달리 잘 산화되지 않고 오랫동안 보존될 수 있다. 우리나라 전통 종이인 한지의 우수성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오방색, 한지, 배접 방식, 자연 석채의 사용, 도제식 교육 등. 탱화 본래의 목적은 불교 교리 전파겠지만 면면히 살펴보면 우리나라 역사를 느낄 수가 있다. 김송희 불모가 그린 탱화도 불교라는 종교적 한계를 넘어서 전통 작품으로 오랜 기간 역사 속에서 숨쉬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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