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미경 대전산내사건유족회장, 좌익사범의 딸 신산의 세월 속 2013년 재심에서 무죄 받아내
[더팩트 | 대전=김성서 기자] 전미경(74) (사)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장은 두 돌이 지났을 무렵 사망한 부친의 얼굴이 떠오르진 않지만 매년 이맘 때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부친인 고 전재흥씨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3월 4일 대전 골령골에서 숨졌다
지난 23일 비가 내리는 대전 동구 낭월동의 이른바 골령골 유해발굴지에서 만난 전 회장은 "사진만 보고 ‘아버님이구나’ 생각한다. 오빠와 언니가 있었지만 모두 일찍 사망해 귀한 딸이라고 애지중지하셨다고 한다"고 부친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전했다.
민간인 학살 피해자인 전재흥씨는 좌익 활동을 하던 동생이 피신할 수 있도록 자신의 도민증을 건넸다가 돌아오지 못한 길을 떠났다. 동생을 쫓던 경찰의 수사망이 자신을 향하자 산으로 피신했지만 몸이 약해 첫 돌이 넘어서도 제대로 서지 못하던 딸의 건강과 안위가 가장 큰 걱정이었다.
그러던 중 음식을 챙겨 온 아내로부터 ‘딸이 걸음마를 뗐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모습을 직접 보고 싶은 마음에 자정 넘어 집으로 내려왔다가 잠복해 있던 경찰들에게 체포됐다. 이후 한 우익 인사를 살해했다는 혐의로 사형이 선고돼 판결 12일 만에 골령골에서 사망했다. 전 회장이 두 돌을 갓 지났을 무렵이었다.
체포를 말리며 경찰에 매달렸던 전 회장의 할머니는 경찰의 소총 개머리판에 어께와 귀를 맞아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했다. 머리 좋고 잘생겼던 전 회장의 막내 삼촌은 연좌제로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없어 이를 비관하다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할아버지는 거듭된 사건으로 인해 정신을 놓았다.
홀로 남은 전 회장은 어린 시절부터 ‘좌익 사범의 딸’이라는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야했다. 그 삶은 고난과 눈물의 연속이었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잠업(누에치기 사업) 공장에서도 일할 수 없어 생계를 위해 농사, 여관 식모, 보따리 장사, 미용 등 닥치는 대로 일해야만 했다. 사업 차 일본에 방문해야 했던 남편의 사촌은 처가의 연좌제로 모든 수속을 마쳐놓고도 일본으로 떠나는 비행기에 몸을 싣지 못했다. 온 집안이 풍비박산, 그 자체였다.
전 회장은 "가까웠던 친척은 불이익이 두려워 남들보다 앞장서서 멸시했고, 동네 사람들은 핍박을 가했다"면서 "외롭고 억울할 때면 ‘아버지에게 이르고 싶다’는 마음에 일기를 썼고, 시를 썼다. 시와 일기가 모였고, 아버지의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뒤 시집 ‘진실을 노래하라’를 냈다"고 말했다.
전 회장은 부친의 누명을 벗기 위해 또 다시 피나는 노력을 쏟아야 했다.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로부터 "아버지의 사망에 불법성을 입증할 수 없다"는 통지를 받았다. 전국을 돌며 아버지의 사망과 관련한 서류를 찾아다니던 전 회장은 충남 계룡시의 육군본부에서 당시 판결문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아버지의 판결문에는 ‘우익 인사를 살해해 사형 판결을 받았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쉽게 납득할 수 없었던 전 회장은 수소문 끝에 유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우익 인사의 죽음에 아버지가 관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를 토대로 진실화해위원회에 이의를 제기, 수정결정문을 받아 재심을 신청했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지 62년만인 2013년 1월 31일, 법원은 전재흥씨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전 회장이 진실을 찾기 시작한지 꼬박 3년 만에 나온 판결로 아버지의 명예를 되찾는 순간이었다.
전 회장은 60년 넘게 살아오던 ‘전숙자’라는 이름도 ‘전미경’으로 바꿨다. 전 회장은 부친의 사망 후 수년이 지난 5살에야 호적에 오를 수 있었다. 당시 조부의 부탁을 받고 대신 면사무소를 찾은 마을 이장이 ‘미경’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채 ‘숙자’라고 올려 오랜 기간을 다른 이름으로 살았다.
그는 "아버지의 재심 결심 공판에서 판사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없냐’고 묻기에 ‘남은 생이 얼마일지는 모르지만 아버님이 지어주신 이름으로 살고 싶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전 회장은 "무죄 판결을 받은 뒤 이름을 되찾았다. 이름을 들을 때마다 아버지가 이름을 불러주는 것 같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아버지의 누명은 벗었지만 법정 다툼이 전 회장을 짓누르고 있다. 법원은 2014년 전재흥씨에게 형사보상금 3797만원을 지급하라고 했지만 검찰과 육군은 2016년 ‘형사보상금 지급에 앞서 민사 소송을 통한 국가배상금 1억600여만원을 중복으로 받아 부당 이익금에 해당한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이로 인해 전 회장이 사는 집이 가압류를 당했다.
1심 재판부는 검찰과 육군의 손을 들어줬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부당이득이 성립된다고 보기 어렵다’며 청구를 기각했다. 결국 2017년 대법원까지 갔지만 4년 째 ‘심층 검토’만 계속되고 있다. 억울했던 전 회장은 최근 청와대 국민청원에 사연을 올려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는 "태어난지 24개월만에 아버지를 죽이고, 평생 연좌제를 씌우더니 이제는 재판으로 괴롭히는 것 같다. 이 사건에 평생 올가미를 쓰고 사는 것 같다"면서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육군과 검찰에서 치졸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하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한탄스러울 뿐"이라고 말했다.
충남 부여에 사는 전 회장은 매일 왕복 세 시간이 넘는 길을 오가며 산내 골령골 유해발굴지를 찾는다. 그는 "자식이 못났기 때문에 아버지가 70년 넘게 이곳에 있는 것 같다. 자식의 도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매일 매일 현장을 찾게 된다"며 "집에 있으면 답답한 마음과 아버지에게 함부로 하는 기분이 들어 매일 찾는다"고 했다.
전 회장은 하루라도 빨리 아버지를 편하게 모시는 것이 목표다. 2024년 희생자 추모시설 등을 포함한 ‘진실과 화해의 숲’ 공원이 들어설 예정인데, 그 전까지 부친의 유해라도 찾고 싶은 마음이다. 그는 "누명을 쓰고 총살을 당했는데 유해도 찾지 못한 채 골령골에서 70년 넘도록 방치돼 있는 것이 억울하다"면서 "아버지의 억울함을 달래드리기 위해서라도 꼭 찾아 모실 것"이라고 말했다.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등 관련 단체들은 매년 6월 27일 낭월동 산 13-1번지 골령골 유해발굴지에서 희생자 합동위령제를 지낸다. 오는 27일 오후 2시 22번째 위령제가 진행될 예정이다. 전 회장은 "1950년 6월 28일 첫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다고 한다. 제사는 원래 살아계신 날에 지내는 것인 만큼 매년 6월 27일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산내 민간인 학살 사건은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6월 28일부터 제주 4·3사건 관련자, 국민보도연맹원, 대전형무소 수감 정치범 등을 학살한 사건이다. 30~180m에 이르는 구덩이 여러 곳에서 4000~7000여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각각의 구덩이를 연결하면 길이가 1㎞에 달해 골령골은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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