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인된 피해자 50명 '강서구 H하우스 신탁사기 의혹'
전문가들 "법적 구제책 없어…신탁부동산 유의해야"
전세사기가 청년을 울린다. 인천 미추홀구를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전세사기 사건이 터지고 있다. <더팩트>가 찾은 곳은 서울 강서구 등촌동. 뜻밖의 재앙을 당한 피해자 청년들은 막막할 뿐이다. 2회에 걸쳐 '서울 강서구 H하우스 사건'을 들여다본다. <편집자주>
[더팩트ㅣ김세정 기자·황지향 인턴기자] '신탁'이라는 낯선 단어는 모든 걸 집어삼켰다. 부모의 피와 땀, 눈물이 어린 보증금을 잃게 생겼다. 곧 비워줘야 할지도 모르는 공간에 누운 청년은 오늘도 뒤척인다. '다 잘될 거야'라는 환상 없이는 잠을 청하기 힘든 밤이다.
전세사기는 청년 세입자들의 순수함을 이용한다. 서울 강서구 H하우스 사건도 그렇다. 돌이켜보면 승호(26·가명) 씨의 전세계약에는 이상한 점이 있었다. 지방 출신인 승호 씨는 누나의 도움을 받아 함께 주변 공인중개사를 찾아갔다. 보여준 방 4개 중 3개가 H하우스였다. 지하철역과 가깝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고, 가격도 괜찮았다. 집에서 마련해준 보증금 7000만원으로 계약했다.
신탁을 "건물을 혼자 관리하기 어렵다 보니 신탁사(B사)가 관리해주는 것"으로 여겼다. 학교를 갓 졸업한 청년이 신탁 개념을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등기부등본만 살폈다. 전세보증금을 건물주 A씨의 법인이 아닌 A씨의 개인계좌로 보내라는 점도 조금 이상하긴 했다. 입주설명서와 입금영수증만 받은 승호 씨는 설레는 마음으로 짐을 옮겼다. 신탁원부나 동의서의 존재는 몰랐다고 한다.
승호 씨는 동의서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A씨 대신 H하우스를 관리하는 관리소장 김모 씨에게 연락해 "동의서를 발급해달라"고 요청했다. 김씨는 "조금만 기다리면 우체통에 넣어주겠다"고 했지만, 소식은 없었다. 알고 보니 집주인인 줄 알고 계약금을 보냈던 A씨는 실소유주가 아니었다. 계약을 진행했던 공인중개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우리도 자초지종을 파악하고 있다. 알아보는 대로 연락주겠다. 우리도 피해자"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H하우스는 6월 초 공매로 넘어갔다. 승호 씨 같은 경우는 B사의 동의 없는 계약을 체결한 셈이다. 전입신고를 하고 확정일자를 받았어도 임차권을 인정받지 못한다. 공매에서 낙찰된다면 주인이 바뀌어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 '불법 점유자'로 간주돼 집을 비워야 한다.
또 다른 피해자 연경(가명) 씨도 신탁이 생소하긴 마찬가지였다. 연경 씨는 "신탁사기라는 게 일반적이지 않다. 제가 피해를 당한 것을 알고 나서야 검색을 해봤다"며 "뉴스에서 전세사기 사건을 볼 때마다 피해자들이 불쌍하다는 생각만 했지, 내 일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라고 말했다.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피해 청년들은 지원센터의 문을 두드렸다. 법률가를 찾아가 문의도 해봤다. "이 계약서는 법적 효력이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뾰족한 구제책은 없었다. 지난달 25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전세사기특별법에는 승호 씨, 연경 씨처럼 신탁사기 피해자도 지원대상에 포함하기로 했다. 다만 이들이 실질적 지원을 받기는 까다롭다. '대항력'을 갖추지 못해 정부가 요구하는 일부 자격요건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긴급복지지원 정도는 받을 수 있지만 피해를 메꾸기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다.
'세입자114'의 이강훈 변호사도 "법률적으로 현재 피해자들이 보상받을 방법이 없어 보인다"고 설명했다. 피해자들을 '무단 점유자'로 볼 수밖에 없어 소유자와의 관계에서 대항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A씨와 공인중개사 등을 대상으로 형사대응 정도는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채다은 변호사는 'A씨 등을 대상으로 민형사소송이 가능하냐'는 질의에 "가능하지만, 실질적으로 집행이 안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법원이 정황을 봐서 사기라고 해석을 할 수는 있겠지만 임차인이 제대로 확인을 안한 것으로 판단할 수도 있다고 한다. 법적인 구제 조치는 요원하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신탁이 안 된 부동산을 계약하는 게 안전하다고 권한다. 신탁등기가 돼 있을 땐 등기소에서 신탁원부를 떼서 확인해야 한다. 다만 "신탁이라는 개념 자체가 권리관계가 복잡해 일반인이 이해하긴 어려워 대응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애초에 조심하는 것이 좋다"고 강조했다.
H하우스 신탁사기 피해자들은 피해자모임을 구성해 공동대응 중이다. 강서경찰서는 H하우스 사건과 관련해 지난 3월 수사에 돌입했다. 피해자 일부는 되려 A씨의 대응을 기다렸다고 한다. A씨는 "돈은 마련할 것이다. 다른 부동산을 매각해서라도 정상화 할 것"이라며 임차인들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A씨와의 연락은 점차 어려워졌다. 취재진도 A씨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닿지 않았다. 경기 화성의 법인 사무실에서도 만날 수 없었다. 우편함에는 국세청이 보낸 듯한 우편물이 가득 꽂혀있었다.
H하우스 관련 계약을 진행했던 공인중개사 C씨는 "저도 피해자"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과실이나 금전적인 걸 떠나서 (집을 소개한 입장이니까 피해자들에게) 저도 미안하다. 미안해서 잠도 못 잔다"라고 말했다. 신탁원부에 대해서도 "보여드리지 않고 (계약을) 진행하지 않는다. 신탁원부를 누락하고는 계약 진행이 불가하다"고 설명했다. 중개보조원도 "신탁원부는 다 보여줬다. 설명드릴 수 있는 건 다 했었다"고 해명했다.
현재까지 확인된 피해자는 50명이 넘는다. 이들에겐 경찰 수사가 사실상 마지막 희망이다. 피해자들은 하나둘씩 경찰에 출석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경찰은 A씨 등 사건관계자들을 상대로 수사를 벌이고 있다.
이들에게 2023년 서울은 잔혹한 도시다. 계획을 묻자 한 피해자는 "솔직히 없다. 방법이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특별법 지원에 우리가 포함된다면 안심하겠지만 당장 지금 공매가 진행 중이다. 새로운 낙찰자가 나타나 바로 강제집행을 하면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sejungkim@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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