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권 변론재개 뒤 시건현장 집중 심리…'폭행 아닌 해프닝'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압수수색 중 한동훈 법무부 장관을 폭행한 혐의를 받은 정진웅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의 항소심 선고는 애초 4월 28일이었다. 재판부가 선고기일을 미루고 직권으로 변론을 재개하면서 다른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지난달 17일 재개된 재판에서 재판부는 두가지를 요청했다. 사건 현장을 촬영한 동영상에 나타난 소파와 탁자 등의 가구 배치를 객관적으로 수치화한 자료가 첫번째였다. 다음은 현장에 있었던 법무연수원 수사관에 대한 증인신문을 제안했다. 모두 2년 전 사건 현장 파악에 중요한 대목이었다. 이를 집중적으로 살핀 결과 정 연구위원의 무죄에 유의미한 영향을 줬다. 이날은 공소사실상 피해자인 한 장관의 취임일이기도 했다.
◆1심은 제압, 2심은 해프닝…같은 현장, 다른 판단
정 연구위원은 2020년 7월 29일 이른바 '채널A 사건'에서 언론과 유착한 검사로 지목된 한 장관(당시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을 경기 용인 법무연수원 사무실에서 압수수색하던 중 폭행한 혐의를 받았다. 검사가 직무 중 신체에 대한 유형력을 행사한 사안이라 특정범죄가중법상 독직폭행 혐의가 적용됐다.
정 연구위원 측은 재판 과정에서 한 장관이 압수 대상인 휴대전화로 증거인멸을 시도하려는 정황을 포착하고 이를 확보하려다 함께 넘어졌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1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당시 양철한 부장판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심 재판부에 따르면 정 연구위원은 갑작스럽게 접근해 휴대전화를 빼앗아 가려했고 한 장관은 소극적으로 저항했지만 제압당했다. 두 사람이 바닥에 미끄러져 피해자의 몸 위에 올라탄 상황이 돼서도 정 연구위원은 신체접촉을 중단하지 않았다. 한 장관으로서는 휴대전화를 수사팀에 뺏기지 않으려 소극적 저항을 했을 뿐인데, 정 연구위원은 독직폭행의 '미필적 고의'를 갖고 지나친 물리력을 행사했다는 판단이다.
하지만 2심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2부(이원범 부장판사)의 판단은 달랐다. 정 연구위원이 한 장관과 함께 쓰러져 그의 몸을 누르게 된 상황을 1심 재판부는 '제압'으로 표현했지만, 2심 판결문에서는 '의도치 않게', '중심을 잃고'라는 구절이 자주 등장한다. 휴대전화를 확보하기 위한 제압 내지 폭행이 아니라, 확보하는 과정에서 중심을 잃고 쓰러진 '해프닝'이라는 것이다.
변론재개 뒤 가구 크기와 배치 등 사건 현장을 면밀히 심리한 결과였다. 정 연구위원과 한 장관의 위치, 한 장관이 앉아 있던 소파의 형상 및 높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 그 결과 정 위원이 소파에 앉아 있던 한 장관이 피하는 방향으로 계속해 이동하면서 휴대전화를 확보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중심을 잃고 한 장관의 몸 위로 쓰러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정 위원이 바닥에 쓰러진 한 장관의 몸을 눌렀더라도 이는 고의적이라기 보다는 바닥에 쓰려진 뒤 연속된 동작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정 위원은 휴대전화를 빼앗은 직후 몸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를 두고 재판부는 "피고인에게 피해자 신체에 유형력을 행사하고 그 위험성을 용인하는 내심의 의사가 있다고 볼 수 없다"라고 판시했다.
◆무죄지만 '깊이 반성하라' 훈계한 이유…"증거인멸 없었다"
정 연구위원은 사건 직후부터 한 장관이 증거인멸을 시도하는 정황을 보고 신체적 접촉을 하게 됐다고 주장해왔다. 법원이 인정한 사실에 따르면, 정 연구위원은 압수수색에 앞서 한 장관이 페이스 아이디(안면 인식) 방식으로 휴대전화 잠금 설정을 했다는 내용을 보고받았다. 이후 압수수색을 나온 수사팀에게 한 장관은 '변호인 참여를 위해 휴대전화를 이용하게 해 달라'라고 요청했고 수사팀은 이를 허락했다. 하지만 한 장관은 안면 인식 대신 비밀번호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정 연구위원은 한 장관이 비밀번호를 입력해 텔레그램·카카오톡 메시지를 지우려 한다고 판단해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고 말하며 한 장관을 제지했고 두 사람이 함께 쓰러지며 사건이 됐다.
한 장관의 증거인멸 시도 여부는 재판 내내 다뤄진 큰 쟁점이었다. 정 연구위원의 주장대로 한 장관이 증거인멸을 시도했다면, 실체적 진실을 밝혀야 하는 검사로서는 이를 제지해야 하는 당위성이 생기는 셈이다. 한 장관의 휴대전화는 채널A 사건 재판에서도 '판도라의 상자'로 여겨졌다. 한 장관이 휴대전화 잠금 해제를 거부해 끝내 포렌식이 이뤄지지 못하면서 증거인멸 시도 여부는 법원 안팎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1·2심 법원은 '한 장관은 증거인멸을 시도하지 않았다'라고 판단했다. 정 연구위원의 혐의를 유죄로 본 1심 재판부는 "유형력 행사 끝에 피고인이 확보한 휴대전화 화면에는 'IPhone을 재시작한 후에는 사용자 암호가 필요합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가로로 신 형태의 비밀번호 입력창이 떠 있었다. 이 같은 상태에 비뤄 피해자는 휴대전화를 재시작하기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피해자가 사건 당시 휴대전화를 껐다가 켜면서 비밀번호를 입력해 긴 시간이 소요된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이 같은 행위를 증거인멸이라고 보기 어렵다"라고 판단했다. 2심 재판부 역시 "객관적인 확인 절차에 따르면 피해자의 증거인멸 시도는 없었다고 보인다"라고 봤다. 이에 따라 2심 재판부는 정 연구위원에게 무죄를 선고하면서도 "당시 직무집행이 정당하다고 판단한 건 아니다. 직무에 복귀하더라도 영장 집행 과정 중 돌발상황에서 겪은 피해자의 아픔을 깊이 반성하라"라고 당부했다.
ilraoh@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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