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 회복의 기회...'정인이' '박원순' 사건 전철밟지 말아야
[더팩트ㅣ김병헌 기자]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명저 ‘역사의 연구’에서 문명의 발전법칙을 ‘도전과 응전의 원리‘로 설명한다. 외부의 도전을 창조적인 소수가 잘 극복한 문명은 번성했지만 그렇지 못한 문명은 사라졌다는 게 핵심이다. 특히 도전을 극복하고 이룩한 문명도 자신들의 성공을 절대적 진리처럼 우상화하는 오만에 빠지면 자멸한다고 설명한다.
토인비는 이를 ‘휴브리스(Hubris)’라고 부른다.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로 ‘지나친 오만’을 뜻한다. 성공에 취해 우상화의 오류에 빠지는 사람이나 현상을 지칭하기도 한다. 세계적인 기업들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원인도 휴브리스 현상 가운데 하나인 ‘성공의 역설’을 꼽는다.
역사는 누구도 예외가 없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절차를 무시하고 자신이나 자신의 조직만 예외를 인정하려는 이기심, 공직자들의 불법이나 탈법, 부적절한 처신도 휴브리스가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최근 들어 휴브리스로 인한 파멸에 이르는 시간은 훨씬 짧아진다. 경계의 수위도 그만큼 더 끌어올려야 한다.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순식간에 세상에 드러나 조직이나 기업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25일 경찰청. 올해 새롭게 출범한 경찰의 수사 총괄 컨트롤타워인 ‘국가수사본부’의 최고 책임자가 고개를 숙였다. 이용구 법무부 차관이 택시기사를 폭행한 사건과 관련, 경찰 수사관이 핵심 물증인 차량 블랙박스 영상을 확인하고도 덮은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사건을 수사한 서울 서초경찰서 수사관이 택시기사의 폭행 영상을 보고도 "못 본 걸로 할게요"라며 덮었다는 보도가 나온 지 이틀만이다.
경찰은 "폭행 영상은 없었다"고 줄기차게 주장해왔다. 국가수사본부장 직무대리를 하고 있는 최승렬 경찰청 수사국장은 지난 12월 28일 기자간담회에서는 '이 차관의 범행을 입증할 택시 블랙박스 영상이 없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그러다 이날 "일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돼 상당히 송구한 마음"이라고 사과했다. 또 "담당 수사관이 왜 영상에 대해 보고하지 않았는지 일부 진술한 게 있지만 내용을 공개할 수는 없다"며 "조사 결과에 따라 수사관이 피의자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얼마 전에도 비슷한 일은 또 있었다. 전 국민을 분노와 경악으로 몰아넣은 정인이 사건의 부실 수사다. 지난 20일 김창룡 경찰청장은 양부모 학대로 숨진 ‘정인이 사건’과 관련해 "학대 피해 아동의 생명을 보호하지 못한 점에 경찰 최고 책임자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며 사과했다.
지난 6일에도 한 차례 사과했지만 ‘부실수사 경찰을 파면하라’는 등 국민들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 등에 여러 건 청원이 올라오자 재차 고개를 숙였다. 수사 역량과 인프라의 부족으로 어쩔수 없었다는 일부 지적이 있긴 했지만 백번 양보해도 합리적 이유가 절대 될 수 없었다.
휴브리스 현상이 빚은 타성에 젖은 수사 방식과 조직의 이기심 등이 근본적인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 대다수 국민들도 그렇게 믿고 사실이 그랬기 때문에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던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국민들의 관심이 집중됐던 엄청난 사건들에 대해 번번이 "문제가 없다"며 경찰은 깔아뭉갰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사건’에 대해서도 지난달 경찰은 박 시장이 사망했다는 이유로 성추행 사실 관계조차 밝히지 않은 채 ‘공소권 없음’으로 수사를 종결했다.
46명의 경찰관으로 구성된 전담수사팀이 167일간 수사한 결과라면 누가 믿겠는가? 말도 안되는 결과를 내놓고 뻔뻔하기까지 했다.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는 부실 수사’란 비판은 당연하다.
이어진 검찰 수사에서부터 박 전 시장이 측근에게 사실상 성추행을 시인하는 내용의 말을 하고 문자 메시지를 보낸 사실이 드러난다. 또 법원에서 "피해자(박 전 시장 비서)가 박 전 시장 성추행으로 상당한 정신적 고통을 받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판단을 내놓는다.
국가인권위원회도 25일 "박 전 시장의 언동은 성희롱"이라는 조사 결과까지 내놨다. "최선의 노력을 다했음에도 결론을 내리는 데 증거가 충분치 못했다고 판단했다"는 경찰의 해명은 소가 웃을 일이다.
24일 뒤늦게 진상조사단을 꾸려 조사에 착수한 ‘이용구 차관 폭행 사건’만도 현재로는 기대난망이다. "사건 덮으라고 지시한 고위 공직자가 있을 것 같은데? 누군지 조사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담당 경찰이 무슨 힘이 있어서 내사종결을 했겠어요. 윗선이 개입한 게 아니라면 이 정도로 큰 사건을 담당 경찰이 혼자서 내사종결을 했다는 건데 납득이 안 되네요." ‘부실 수사’ ‘눈치 보기 수사’라는 국민적 비판은 자업 자득이다.
경찰은 검찰과의 수사권 조정으로 ‘1차 수사 종결권’을 쥐게 됐다. 하지만 걸맞은 역량과 자격을 갖췄느냐는 의구심도 커진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최근 상황은 경찰 조직 내부에 교정, 자정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며 "조직 내부의 신뢰가 확보되지 않으면 모든 사건을 위에서 일일이 들여다보는 비효율이 초래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조정의 재검토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국민과 가장 가까이 있는 경찰부터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앞으로도 경찰이 무혐의 판단으로 수사를 종결할 경우 검찰이 사후 점검을 할 수는 있지만 부당한 사건 처리가 걸러지지 않을 가능성은 여전하다.
경찰이 확대된 권한에 걸맞은 자립적인 수사기관으로 안착하려면 국민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열쇠는 공정하고 엄정한 수사다.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엄정하게 규명하고 재발 방지책을 마련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국 후한(後漢)의 역사가 반고((班固)가 편찬한 한서(漢書) 위상전(魏相傳)에 ‘교병필패(驕兵必敗)’라는 말이 있다. 강병을 자랑하는 군대나 싸움에 이기고 뽐내는 군사는 반드시 패한다는 의미다. 이 차관 사건 수사는 경찰로서는 신뢰 회복의 기회다. 그는 현 정권의 실세로 꼽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더 엄정하게 수사해야 한다. 그래야 경찰이 산다.
bienns@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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