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을 위한 법원' 목표는 같지만 법조계 내 온도차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5월 대전고등법원에서 '존댓말 판결문'이 나와 눈길을 끌었습니다. 법원 권위와 판결문의 객관성을 해칠 수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관행을 깬 한 판사의 용기 있는 시도를 환영하는 시민들 역시 많았습니다. 이에 대한 반증일까요? 국가인권위원회 역시 7월부터 결정문의 주문을 '권고한다'에서 '권고합니다'로 수정했습니다. <더팩트>도 이번 기사 만큼은 독자 여러분께 존댓말로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어떠신가요? <편집자 주>
지난 5월 70년 넘게 예삿말로 판결문을 써온 오랜 전통을 깬 '존댓말 판결문'이 나왔습니다. 지난 2013년 서울중앙지법 김환수 부장판사가 쓴 긴급조치 위반 사건 재심 판결문도 경어체를 사용했지만 마지막 구절에만 적용했습니다. 사실상 처음으로 판결문 전체에 존댓말을 쓴 이인석 대전고법 부장판사는 언론 인터뷰에서 '판결문을 받는 사람은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고, 나라의 주인에게 보내는 판결문은 존댓말 형식으로 쓰는 게 자연스럽다'고 밝혔습니다.
어렵고 딱딱한 판결문이 존댓말로 바뀌자 다 환영했던 건 아닙니다.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습니다. 지난 10월 이 부장판사가 근무하는 대전고등법원에서 열린 국정감사. 유상범 국민의힘 의원은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사법 신뢰를 위한 판사의 노력이라고 평가할 수 있지만, 법원의 권위가 떨어질 거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김광태 대전고등법원장 역시 "긍정적인 부분도 있고 우려도 있다"며 동의했습니다.
종결어미가 '~다'에서 '~습니다'로 바뀐 것 뿐인데 법조계를 비롯한 사회 각계가 이토록 예민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각계에 몸담고 있는 법조인들에게 존댓말 판결문에 대한 생각을 물어봤습니다. 찬반은 나뉘었지만, '국민을 위한 법원'이라는 지향점은 같았습니다.
◆ 권위보다 객관성 떨어질까 우려
사건 당사자는 신속한 재판 진행과 정확한 판결을 가장 원할 겁니다. '사법 신뢰'는 재판 진행 절차를 가다듬고 판결의 정확도를 높이는 데서 오는 것이지, 판결문 문체가 바뀌는 건 큰 의미가 없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부장판사 출신의 A 변호사의 말입니다.
"(존댓말 판결문이) 큰 의의가 있는지 모르겠는데요. 재판 진행에 더 초점을 둬야 한다고 생각해요. 국민이 가장 원하는 건 바로 성숙한 재판 진행 아니겠습니까."
서초동의 한 중견 변호사 역시 비슷한 의견이었습니다.
"지나치게 권위적인 문체를 버리고 읽기 쉬운 판결문을 작성해야 한다는 취지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재판이 진행되는 현장인 법정에서 소송 당사자를 배려하는 재판 진행 방법을 마련하는 것이 선행돼야 합니다. 판결문 문체를 굳이 바꿀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네요."
정확성과 객관성이 중요한 판결문인 만큼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습니다. 부장판사 출신 B 변호사는 "판결문도 일종의 공문서로 객관성이 생명"이라며 "존칭을 쓸 경우 판사의 사적인 감정이 담겼다고 오해할 수 있다. 이를테면 존칭도 극존칭과 가벼운 존칭이 있는데, 읽는 이로 하여금 각각 달리 받아들여지게 마련"이라는 의견을 냈습니다.
'더 읽기 힘들다'는 현실적인 말도 나왔습니다. 익명을 요청한 한 변호사는 "존댓말을 쓰게 되면 문장이 더 길어질 텐데, 안 그래도 방대하고 어려운 판결문을 더 읽기 어려워질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 한글 전용 판결문 나왔을 때도 비슷한 상황
존댓말 판결문을 환영하는 법조인들도 꽤 많습니다. 고압적이고 권위적인 인상을 벗고 소송 당사자인 국민을 존중하는 법원으로 쇄신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이유입니다. 익명을 요청한 공익 변호사의 말을 들어보시죠.
"판결문도 결국 소송 당사자에 판사의 판단을 설명해 주는 자료라는 점에서 존댓말을 쓰는 건 매우 자연스러운 예의죠. 법리를 잘 모르는 시민들에게 가독성도 더 뛰어날 테고요. 한국의 판사 사회는 해외보다 경직되고 획일화됐잖아요. 이런 문화가 판사 본인은 물론 소송 당사자에게 이롭겠습니까. 이번 존댓말 판결문을 계기로 판사의 재량권이 넓어졌으면 좋겠네요."
임지봉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소장(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은 지금 나오는 우려를 '기우'라고 평했습니다. 그러면서 과거 판결문이 한자로만 쓰였던 점을 근거로 들었습니다.
임 소장은 "한자보다 동음이의어가 많은 한글을 쓰면 내용 전달에 혼동이 있을 거라는 우려가 있었지만, 어느 것도 현실화되지 않았다. (존댓말에 대한 우려는) 관성의 법칙에서 오는 기우"라며 "존댓말이야말로 공손하면서도 객관적이고 공식적인 언어로, 법원과 국민 사이 거리를 좁힐 수 있고 판결에 대한 승복도 더 높아질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 '존댓말 판결문' 받은 변호사에게 들어보니
'70년의 전통을 깼다'는 보도가 쏟아진지 6개월 가량이 흘렀습니다.
최정규 변호사는 얼마 전 한 수도권 법원에서 존댓말 판결문을 실제로 받았습니다. 최 변호사는 무엇보다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고 말합니다. 단순히 '존댓말' 때문이 아니라, 소송 당사자를 존중하고 배려하기 위해 법원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고 합니다.
최정규 변호사는 "소위 유명인 재판은 판사들이 심혈을 기울이지만, 시민의 소소한 사건은 무성의한 판결문이 적지 않았다"며 "2년을 끈 의료소송이었는데 이유도 적지 않은 판결문을 받은 적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법원이 사건을 대하는 태도가 무성의하다는 문제의식을 느꼈는데 존댓말 판결문의 등장은 변호사로서 정말 반가웠고 실제로 받게 되니 더 반가웠습니다. 한국 법원은 기본적으로 소송 당사자에 굉장히 불친절하고 불편한 기관입니다. 시민들이 존댓말 판결문을 반기는 이유가 무엇인지 법원이 진지하게 고민할 시기 아닐까요."
ilraoh@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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