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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우성의 B급칼럼] 발레리아를 위한 '레퀴엠'

  • 사회 | 2019-06-30 00:01
엘살바도르인 오스카 알베르토 마르티네즈 라미네즈와 그의 2살 딸 발레리아가 2019년 6월 23일 미국과 멕시코 국경지대 리오그란데강을 건너다 실종돼 이튿날 강둑에서 발견됐다. /AP.뉴시스
엘살바도르인 오스카 알베르토 마르티네즈 라미네즈와 그의 2살 딸 발레리아가 2019년 6월 23일 미국과 멕시코 국경지대 리오그란데강을 건너다 실종돼 이튿날 강둑에서 발견됐다. /AP.뉴시스

아시아 최고의 민주 국가, 자유 찾아온 난민 외면 말아야

[더팩트ㅣ장우성 기자] 2018년 10월 14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에서 열린 미사에서 오스카 로메로(1917~1980) 대주교를 성인으로 선포했다. 로메로 대주교는 엘살바도르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하다 1980년 미사 집전 도중 군부 암살단에 살해됐다.

로메로 대주교의 죽음 이후 엘살바도르 내전은 격화되고 군사정부의 본격적인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다. 라틴 아메리카 역사상 최악의 대량 학살로 꼽히는 1981년 ‘엘모소테 학살 사건’에서는 어린이와 노인을 포함한 1000명의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정부는 2012년에 이르러서야 공식 사과했으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지금까지도 이뤄지지 않았다.

2019년 6월 23일. 리오그란데 강이 삼킨 두 살배기 소녀 발레리아는 바로 이 나라, 엘살바도르에서 태어났다. 발레리아는 ‘안전하고 잘 사는 나라’ 미국으로 가기 위해 미-멕시코 국경지대의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다 아빠와 급류에 휩쓸렸다. 살아남은 엄마는 사랑하는 두 사람이 수장되는 참상을 보고도 절규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엘살바도르는 스페인어로 ‘구세주’라는 뜻이다. 그러나 엘살바도르 정부는 물론 미국도 발레리아에게, 엘살바도르인에게 구세주는 아니었다. 미국은 1970년대부터 군사정부의 강력한 후견인이었다. 1980년 엘살바도르 국가수비대원이 군사정부에 저항하던 미국인 수녀를 강간살인 한 만행이 일어났는데도 군사원조를 계속하고 민간인 학살에는 침묵했다.

1992년 내전 종식 후에는 장기 내전의 유산인 무장 갱단이 치안을 유린했다. 엘살바도르 인구의 1%가 무장 갱단이라는 통계도 있다. 급기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민자 추방을 추진하면서 미국에 넘어간 엘살바도르인이 보내던 해외송금액도 끊길 위기에 처했다. 이는 2016년 기준으로 이 나라 GDP의 17%에 이르는 규모다. 또 다른 발레리아가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다.

엘살바도르 군사정부에 피살된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1917~1980)/AP.뉴시스
엘살바도르 군사정부에 피살된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1917~1980)/AP.뉴시스

우리도 발레리아에게서 자유롭지 않다. 소녀의 죽음을 알리는 한국 언론의 인터넷 기사에는 주렁주렁 댓글이 달렸다. ‘시체팔이 그만 둬라’ ‘감성팔이다’ ‘난민 반대’ ‘우리나라 불법이민자도 싹 추방해야 한다’ 같은 혐오 발언이 넘쳐난다. 지금 한국 사회는 트럼프를 배출한 공화당조차 애도하는 소녀의 죽음 앞에서도 옷깃을 여밀 품격이 없다.

비행기로 12시간이 넘는 거리인 낯선 땅의 비극을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표현의 자유를 방패 삼은 혐오 발언들이 우리 사회에 창궐한다. 세월호 유족, 여성, 이주민, 성소수자,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를 향한 조롱은 이미 심각한 수준이다. 국회 의석수 1/3을 차지한 제1야당의 수뇌부가 공식석상에서 "국가에 기여한 것 없는 이주노동자에게 같은 임금을 줘서는 안 된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또 다른 발레리아도 만들고 있다. ‘아시아의 허브’ 인천공항 보안구역에는 앙골라에서 온 루렌도 가족이 강제 송환의 공포에 떨고 있다. 이 부부에게는 레마(9), 로드(8), 실로(8), 그라스(6) 4남매가 있다. 네 어린이는 불규칙한 식사와 열악한 환경에서 교육도 받지 못한 지 반 년이 넘었다. 난민인정심사 회부조차 거부당한 이들은 행정소송을 냈으나 1심에서 패소했다. 앙골라는 호세 에두아르도 도스 산토스 전 대통령이 38년간 장기 집권하는 동안 수많은 인권침해 논란을 일으켰다. 현지에서 차별받는 소수민족인 루렌도 어린이들이 되돌아가야 한다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우려스럽다. 그런데 국내에는 이들의 송환을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까지 등장했었다.

난민대책국민행동이 지난해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정부의 예멘인 난민심사 결정에 대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이덕인 기자
난민대책국민행동이 지난해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정부의 예멘인 난민심사 결정에 대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이덕인 기자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인 배우 정우성 씨는 ‘우리도 난민이었다’고 말한다. 실제 우리 민족은 대한제국 말기부터 빈곤과 일제의 학정을 피해 중국, 러시아, 하와이, 멕시코, 쿠바로 떠났다. 국가기록원 자료에 따르면 중국의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한인들은 당시 입국이 금지된 지역에서 농지를 개간하면서 신분상 불안정한 생활을 꾸려갔다. 한일병탄 이후 본격화된 식민지 수탈과 독립운동 탄압에 조국을 등져야 하는 사람은 늘어났고 간도참변, 관동대학살 등에서 무참히 희생 당하기도 했다.

이제 대한민국은 아시아 최고 수준의 민주주의 국가로 손색이 없다. 엘살바도르, 앙골라 못지않은 독재 정권 아래 수많은 희생을 거쳐 이뤄낸 역사다. 억압을 피해 자유를 찾아온 약자들을, 이제는 볼 수 없는 발레리아의 큰 눈망울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로메로 대주교에게 성인의 칭호를 선사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발레리아의 비극에도 가슴 아파했다. 로마 교황청은 "교황 성하께선 아버지와 어린 딸의 모습을 막대한 슬픔으로 지켜봤다. 그들의 죽음에 깊이 슬퍼했으며 그들을 위해, 전쟁과 고통에서 달아나다 목숨을 잃은 모든 이민자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교황은 3년 전 바티칸에서 난민 어린이들을 만나 지중해에서 익사한 한 난민 소녀가 입었던 구명조끼를 손에 든 채 이렇게 말했다.

"난민은 위험이 아니라 위험에 처한 사람입니다."

난민대책국민행동이 지난해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정부의 예멘인 난민심사 결정에 대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이덕인 기자

leslie@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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