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손 김태영씨 "약산이 공산주의자면 남로당 출신 박정희는 뭔가"
[더팩트ㅣ장우성 기자] '남의사'(藍衣社)는 중국 공산당을 평생 반대한 대만 총통 장제스(1887~1975)가 지휘하던 비밀군사조직이다. 이들은 항일투쟁도 했지만 주로 공산주의자와 장제스의 정적을 처단하는 친위대였다. 조선 독립운동조직도 적극 후원했는데 약산 김원봉(1898~?)이 의열단 이후 일제에 군사적으로 대항하기 위해 조직한 조선의용대가 대표적이다. 이 때문에 약산 김원봉은 '남의사의 지원을 받은 장제스의 스파이'로 몰려 김일성(1912~1994)에게 1958년쯤 숙청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로부터 61년 뒤, 약산 김원봉은 조국 땅에서 '뼛속까지 공산주의자'로 낙인됐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지난 27일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약산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할지 의견을 수렴 중이라고 밝히자 "반 대한민국 북한 공산주의자인 김원봉의 서훈 수여 가능성을 언급했다"며 "김원봉은 뼛속까지 북한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했다.
평소같은 차분하고 점잖은 어투가 아니었다. 감이 먼 국제전화지만 애써 억누르려는 떨리는 숨소리 만큼은 선명하게 전해졌다. 약산 김원봉의 외조카 김태영(63) 씨 이야기다. 그동안 거물 독립운동가 외삼촌의 복권운동을 펼쳐온 김태영 씨는 29일 <더팩트>와 전화 인터뷰에서 나경원 대표의 주장에 울분을 감추지 못 했다. 그는 20대에 미국 유학을 떠나 현재 로스앤젤레스에 산다.
"어떻게 함부로... 함부로..." 인터뷰가 끊기기가 몇 번째, 김태영 씨는 처음에는 말을 잘 잇지 못 했다.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는 "(나경원 대표의 발언은) 역사적 무지와 극우세력을 결집시키려는 의도가 결합된 것"이라고 입을 뗐다.
"역사에 대해 너무 무지하다고 느꼈습니다. 제1야당 원내대표라는 분이 약산같이 독립운동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을 모르고 이야기하면 되겠습니까. 약산이 걸어온 길에 전혀 지식이 없는 것 같아요. '빨갱이 프레임'을 앞세워 극우 지지세력을 결집시키려는 정치적 의도도 보입니다."
약산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는 1940년 내부 갈등을 겪는다. 일본군과 전투가 치열하던 중국 화북지방으로 이동해 중국 공산당 팔로군과 힘을 합치자는 일부 대원들의 주장이 거셌다. 중국 공산당은 전력이 우수한 조선의용대가 탐났지만 민족주의자인 약산 김원봉은 배제하려 했다는 학계의 연구 결과도 있다. 결국 화북으로 향한 무정, 김두봉 등과 달리 약산은 중경에 남아 백범 김구가 이끄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손을 잡는다. 이후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취임하고, 중경에 잔류한 조선의용대는 광복군에 편입된다. 적어도 '뼛속까지 공산주의자'인 사람이 취할 행보는 아니다. 1991년 국내 최초로 약산에 대한 연구성과인 '김원봉 연구'를 발표했던 염인호 서울시립대 교수는 "약산은 민족에게 도움이 된다면 (친일파를 제외한) 어떤 사상, 세력도 포용하려 했던 개방적, 진보적 민족주의자"라고 말했다.
김태영 씨는 "약산을 공산주의자로 몰기 전에 자유한국당의 뿌리인 박정희 전 대통령부터 보라"며 "만주군관학교를 나와 일제에 충성혈서를 쓰고, 해방 후엔 남로당에 입당한 박 전 대통령이야말로 뼛속까지 친일파이자 공산주의자라는 비판을 들을 수 있지않나"라고 되물었다.
1945년 해방 이전 약산의 독립운동 공로는 토를 달기 어려운 분위기다. 시빗거리는 그 이후다. 1948년 북으로 가 국가검열상, 노동상 등 각료를 지냈기 때문이다. 외조카 김태영 씨의 반박이다.
"남쪽이 친일파가 판 치는 세상이 되지 않았으면 약산이 북으로 갔겠습니까. 부모형제 다 사는 고향 땅에 있고 싶겠죠. 친일파 등쌀에 북으로 피신한 거죠. 친일파들이 내쫓고 이제와서 뼛속까지 공산주의자라니요. 북한에서 장관을 한 건 김일성이 자기보다 엄청난 독립운동가가 왔으니 홀대할 수 없었던 거죠. 또 결국 숙청하지 않았습니까."
약산은 해방 후 서울에 머무른 3년 동안 3~4차례 정치적 이유로 경찰에 연행돼 고초를 겪었다. 특히 1947년 4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를 고문하던 친일파 형사 노덕술에게 체포돼 치욕을 당한 일화는 유명하다. 백색테러 위협도 컸다. 1947년 7월 몽양 여운형(1886~1947)이 우익청년에게 암살된 뒤로는 누구나 "다음 차례는 김원봉"이라고 입을 모았다. 같은해 8월부터는 미군정의 대대적인 검거령으로 도피 생활을 해야했고, 그토록 반대했던 남한 단독선거가 기정사실이 되자 남쪽에서 정치적 입지도 줄어들었다. 결국 약산은 1948년 4월 가족과 38선을 넘었고 같은달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한 뒤 남쪽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염인호 교수는 "약산은 사상적 지향으로 북에 갔다기보다는 여러가지 복잡한 사정 때문에 개인적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약산이 북에서 맡았던 국가검열상은 행정감찰 책임자 정도로 6.25전쟁에서 역할도 미미했다. 실제 전쟁 기간 약산의 활동 기록도 발견되지 않았다. 전쟁통에 고향 밀양에 있던 동생 4명, 사촌 5명이 처형당했을 뿐이다. 북한 정권에 기여했거나 6.25때 납북된 인사들이 묻힌 평양 애국열사릉에도 그의 묘지는 없다. 2007년 직접 방문해 이를 확인한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약산은 북한에 가서도 남북평화통일을 주장하다 숙청당했고 애국열사릉에도 묻히지 않았다"며 "우리가 먼저 약산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한다면 우리 체제의 우월함을 다시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약산이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는 길은 험난해 보인다. 나경원 대표는 '뼛속까지 공산주의자' 발언 외에도 "독립운동 공적이 있다고 김원봉에게 서훈을 준다면 김일성에게도 줘야 할 것"이라고도 주장해 논란이 됐다. 이 대목에서 외조카 김태영 씨의 목소리는 더 높아졌다. 김 씨는 "김일성은 소련 스탈린이 찍어서 내려보냈고 6.25전쟁에 책임이 있는 사람 아닌가. 독립운동 경력도 약산에 견줄 바가 못 된다"며 "약산을 김일성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못 박았다. '약산 김원봉 평전'을 썼던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는 "김원봉 선생은 김구 선생과 함께 일제강점기 가장 치열하게 싸운 항일운동의 양대 거두"라며 "약산을 독립운동 사령관으로 친다면 김일성은 연대장 정도다. 김일성이 약산을 숙청한 것은 이런 격차에서 오는 컴플렉스도 작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약산 김원봉의 여동생이자 김태영 씨의 모친인 고 김학봉 여사는 생전인 2005년 국가보훈처에 약산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했으나 불가 통보를 받았다. 현 정부는 서훈을 위해 여론을 수렴하겠다는 입장이지만 한국당의 반대가 거세다. 하지만 김태영 씨는 "나경원 원내대표는 공산주의자 운운한 발언을 취소하고 약산과 후손 앞에 사죄해야 한다"며 이렇게 잘라말했다.
"하늘에 있는 약산 김원봉 선생도 불의(不義)에 구걸해야 한다면 서훈을 거부할 것입니다."
leslie@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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