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지지 않는 권역센터·지역센터·지역기관 역할 구분
[더팩트ㅣ허주열 기자] 텅 빈 환자 대기실, 택시에서 내려 걸어서 들어가는 환자, 119 구급차 베드에 실려 들어가는 환자. 18일 <더팩트> 취재진이 방문한 수도권 소재 종합병원 응급실 3곳의 풍경이다. 서울 소재 한 지역응급의료기관(이하 지역기관)은 1시간이 넘도록 환자가 한 명도 찾지 않았다. 응급실 보호자 대기실에서 만난 한 중년 여성은 "아버님 진료를 위해 (병원에) 왔다가, 이곳이 한적해 잠시 쉬러 왔다"며 "이 병원에 종종 오는데, 여기 응급실은 주말이나 북적일까, 평일 낮에는 환자를 거의 못 본 것 같다"고 말했다.
같은 날 방문한 서울 소재 한 대형병원의 지역응급의료센터(이하 지역센터)는 방문하자마자 의식을 잃은 할아버지 한 분이 119 구급차를 타고 실려왔다. 구급차를 타고 함께 온 할머니는 "원래 지병이 있었는데, 갑자기 의식을 잃어 119에 신고했고, 치료를 받아 온 병원으로 가자고 해 이리로 왔다"고 했다. 이후 환자가 뜸하다 40여 분만에 70대 여성이 스스로 응급실을 찾았다. X레이 촬영을 위해 이동하던 이 환자는 "속이 불편해 응급실을 찾았다"고 했다.
경기도 소재 한 권역응급의료센터(이하 권역센터)는 환자와 보호자가 아니면 응급실 내부로 들어가는 것도 어려웠다. 경호업체 직원에게 방문 목적을 알리고 문을 열어줘야 응급실 내부로 들어갈 수 있으며, 보호자도 1인에 한해 보호자증을 발급 받아야 출입이 가능하다. 권역센터 응급실은 지역센터보다 119 구급차 베드에 실려 오는 환자가 더 많았고, 한 환자는 베드에 누운채로 이송용 응급차를 타고 다른 병원으로 전원되기도 했다.
물론 권역센터라고 중증환자만 오는 것은 아니다. 이 병원 관계자는 "대부분의 환자는 본인이 어느 정도 아픈지 모르고 응급실을 찾는다"며 "결과적으로 보면 중증환자와 경증환자 비율은 4대6 정도"라고 말했다.
국내 응급의료 체계는 권역센터·지역센터·지역기관은 어느 정도 구축됐지만, 병원 간 역할 구분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대병원·고려대병원 등 권역센터에선 중증환자 위주로 응급환자를 받아 최종 처치가 이뤄져야 하는데, 경증환자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서울에는 5개 권역센터가 존재하는데, 고대안암병원·구로병원·서울대병원·한양대병원·이대목동병원 등이다.
응급의료 체계는 적정 규모의 지역에서 응급상황 발생 시 효과적이고 신속하게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인력, 시설, 장비를 유기적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재배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응급환자 발생→현장에서의 적절한 처치→신속하고 안전하게 환자 치료에 적합한 병원으로 이송→짧은 시간 내 최상의 응급의료서비스 제공' 등의 과정에서 119 구급대 및 병원 응급의료팀 간의 유기적 협력 체계 구축이 필수적이다.
◆부족한 인력, 장시간 근무, 낮은 인식…'총체적 난국'
하지만 발목을 접질려, 과일을 깎다 칼에 베어서, 집 가구를 옮기다 허리를 삐끗한 환자 등 경증환자들이 스스로 응급실을 찾는 경우가 과반 이상이다. 보건복지부 '2018~2022년 응급의료 기본계획안' 자료에 따르면 2017년 기준 권역·지역센터의 경증 또는 비응급환자 비율은 57.3%에 달하고, 중증응급환자 비율은 7.1%에 불과하다.
119 구급대도 환자의 경·중이나, 응급실 환자 대기 현황 등을 살피지 않고 무조건 가까운 병원으로 환자를 이송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중증환자의 119 구급대 부적정 이송률을 보면 중증외상은 44.6%, 심혈관계질환은 30.7%, 뇌신경계질환은 31.9%에 달한다.
응급의료는 오는 순서가 아니라 치료가 시급한 환자 순으로 치료가 이뤄져야 하지만, 비응급환자가 응급실 베드를 점령해 치료가 급한 환자가 제때 처치를 못받는 경우도 있다.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이하 응급의료법)에는 '응급환자'를 질병, 분만, 각종 사고 및 재해로 인한 부상이나 그 밖의 위급한 상태로 인해 즉시 필요한 응급처치를 받지 않으면 생명을 보존할 수 없거나 심신에 중대한 위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환자나 이에 준하는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법 다른 조항에 경증환자의 응급실이 아닌 의료시설 진료나 다른 의료기관 이송은 '본인 또는 법정대리인에게 상태를 설명하고, 동의를 얻을 경우'라고 규정하고 있어 사실상 유명무실하다.
한 권역센터 응급의학과 전문의는 "권역센터에선 중증환자 위주로 응급환자를 받아 최종 처치가 이뤄져야 하는데, 경증환자가 절반 이상"이라며 "(의료) 수가가 낮고, 사보험에 가입한 이들도 많은 탓에 응급실 문턱이 너무 낮아 굳이 응급실을 찾을 필요가 없는 환자도 가깝다는 이유로 많이 온다. 119 구급대도 권역·지역의료 체계 등에 따른 환자 이송이 아니라 무조건 가까운 곳의 큰 병원으로 이송하는 경우가 많아 시급한 치료가 필요한 환자에 대한 처치가 늦어기도 한다"고 했다.
◆전국 416개 권역·지역응급의료기관 존재
국내 응급실 구축 현황을 보면 인구가 적고, 의료인력 채용이 어려운 동해·남원·연천 등 일부 시·군을 제외한 지역은 기본적 체계가 어느 정도 구축된 상태다. 중앙응급의료센터 '2017 응급의료 통계연보'(2018 통계연보는 오는 8월 공개 예정)에 따르면 국내에는 36개 권역센터, 116개 지역센터, 264개 지역기관 등이 운영되고 있다.
각 응급의료센터·기관의 역할은 다르다. 보건복지부 장관이 300병상 초과 종합병원 중에서 지정하는 권역센터는 '중증응급환자' 중심 진료와 재난 대비 및 대응 등을 위한 거점 병원의 역할을 한다. 시·도지사가 지정하는 지역센터는 지역 내 응급환자 진료를 기본 업무로 하고, 적절한 응급의료를 할 수 없을 경우 신속히 환자를 이송해야 한다. 시장·군수·구청장이 지정하는 지역기관은 지역센터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416개 응급의료센터·기관의 전담 인력은 전문의 1629명(응급의학 전문의 1228명), 응급의학 전공의 617명, 간호사 6889명이다. 2017년 기준 내원환자 수는 847만5347명으로 응급의학 전문의 1인당 내원환자 수는 6902명, 간호사 1인당 내원환자 수는 1230명이다.
정형선 연세대 보건과학대학 교수가 지난해 12월 보건복지부가 주관한 정책토론회에서 밝힌 자료에 따르면 한의사를 제외한 우리나라의 임상의사 수는 인구 1000명당 1.9명으로 OECD 국가(평균 3.4명) 중 가장 적고, 국민 1인당 의사에게 외래진료를 받은 횟수(16회)는 가장 많다(OECD 평균 6.9회).
국내 의료계가 전체적으로 OECD 평균을 훨씬 웃도는 환자를 소화하고 있는 가운데 응급의학 전문의 수는 인구 1000명당 0.03명 수준으로 업무량이 특히 과도하다.
최근 3년간 인력 증원 현황은 응급의학 전문의의 경우 2017년 148명, 2016년 138명, 2015년 160명이 배출됐다. 같은 기간 전공의 수는 각각 617명, 615명, 587명이다. 4~5년 전까지만 해도 응급의학과는 과도한 업무, 낮은 페이 등을 이유로 의대생들이 기피하는 과였다.
전공의 TO를 채우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몇 년 전부터 흉부외과·비뇨기과·산부인과 등 타 과의 몰락이 상대적으로 더 가속화되며 전공의 TO 이상의 인턴이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환자 수에 비해 의사들이 적어 대부분 큰 병원 응급실은 장시간 근무에 지친 의사들이 전쟁을 치르듯 환자를 맞고 있다.
◆'극한 직업' 응급의학과 전공의
특히 전공의들의 사정은 '극한 직업'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환경이 열악하다. 2016년 12월 23일 시행된 전공의의 수련환경 개선 및 지위 향상을 위한 법률 이전에는 1주일에 100시간 이상 일하는 응급의학 전공의들이 수두룩했고, 이후에는 주당 최대 근무시간인 88시간을 꽉 채워 근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기에는 논문 준비와 개인 공부 시간은 제외된 것이어서 전공의들이 실제 근무 또는 공부하는 시간은 이보다 더 많다. 지난해부터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됐지만, 이들에게는 꿈같은 이야기인 셈이다.
서울 소재 한 대학병원 응급의학과 전공의는 "근무표상 근무시간은 주 88시간이지만, 근무교대 시간을 전후한 추가 근무와 공부 시간은 별도여서 실제 일 또는 공부를 하는 시간은 이보다 더 많다"며 "이 생활을 한지 3년쯤 지나 이제는 적응이 좀 됐지만, 1~2년 차 때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이 전공의는 이어 "근무시간보다 환자 수가 중요한데, 우리 병원은 하루 평균 200여 명에 가까운 환자가 온다"며 "특히 응급환자는 방문시간이 일정치 않아 단시간 내 수십 명이 몰리는 경우가 종종 있어 최대한 빨리 조치를 취한다고 해도 일부 환자는 대처가 늦어질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낮은 의료수가에 관한 조정도 필요한 사항이다. 의료수가와 관련해선 고 윤 센터장도 조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내놓은 바 있다. 그는 지난해 12월 28일 국회에서 열린 '중증응급환자 사망을 줄이기 위한 응급의료 체계 리폼 토론회'에서 "병원장 입장에서 응급환자 몇 명을 보기 위해 의사를 배치하는 것보다 의사 한 명을 외래에 배치해 외래환자 200명을 진료하는 게 낫다"며 "이런 문제 해결을 위해 중환자 수가나 수술 수가 가산을 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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