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누구든 언제든 될 수 있다
[더팩트ㅣ임현경 기자] "악이란 뿔달린 악마처럼 별스럽고 괴이한 존재가 아니며, 사랑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우리 가운데 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말이다. 아렌트는 독일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지휘했던 친위대 장교인 아돌프 아이히만을 보며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을 도출했다.
1961년 <뉴요커>의 특별취재원으로서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열린 아이히만의 재판을 방청하게 된 아렌트는 피고인석에 앉은 남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무수한 이들을 가스실에서 죽게 만든 그가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중년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아이히만은 평소 준법 정신이 투철한 시민이자 조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관리자였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친절한 이웃이었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행위'를 인정했지만 '죄'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이며 상관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도리였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월급을 받으면서도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라 답했다. 아렌트는 이 재판을 토대로 펴낸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를 통해 "파시즘의 광기로든 뭐로든 우리에게 악을 행하도록 계기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멈추게 할 방법은 '생각'하는 것 뿐"이라고 전했다.
학부 때 알았던 아이히만을 떠올린 건 박소연 동물권단체 케어 대표의 기자회견이 열린 지난 19일 서울 서초동에서였다. 박 대표는 이날 수백 마리를 안락사시킨 뒤 사실을 은폐한 까닭으로 "지금 이 상황처럼" "엄청난 비난과 논란"을 들었다. 안락사를 행하면서도 '안락사 없는 보호소'를 표방한 이유가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후원자들을 농락하고, 다른 동물권단체와의 차별화를 통해 특수 이익을 챙긴 일을 모두 '안락사를 비난한 사람들 탓'으로 돌렸다.
곧바로 '수용 능력을 넘어선 대규모 구조가 안락사 논란을 자처했다'는 일각의 비판에 대한 반론이 이어졌다. "동물권단체로서 동물들의 고통과 죽음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비참한 동물들의 현실을 외면하겠다는 것과 같다… 구한 이후 80%를 살릴 수 있고 20%를 고통없이 보내주는 것은 동물권단체이기에 할 수 있는 것이다." 박 대표는 모든 게 동물을 위한 일이었으며, 나쁜 의도는 아니었다고 했다.
악의 평범성을 목도한 순간이었다. 박 대표는 딸 아이를 아끼는 엄마였고, 끔찍한 환경 속에서 학대받고 도살 당하는 개들을 떠올리며 눈물 짓는 애견인이었으며, 동물권 보장을 위해 밤낮없이 현장을 누빈 운동가였다. 그러나 여러 동물들 앞에서 잔인한 도살자가 되었고, 자신을 따르는 직원들에게 독선적인 지휘자의 모습을 보였다. 비난을 피하고 싶다는 이유로 타인을 기망하기까지 했다.
기자회견은 박 대표와 한 기자의 언쟁으로 새 국면에 들어섰다. 박 대표는 한 매체를 지목하며 "딸의 얼굴을 내려달라. 왜 직접 찍지도 않은 영상을 발췌하셔서, 그것도 다른 배경은 친절하게 다 모자이크를 하고"라며 "아기 욕까지 하게 만드는 게 매체가 말하는 진정성이냐"고 토로했다.
이에 해당 매체 소속 모 기자가 손을 들며 "사실을 바로잡겠다"고 나섰다. "다른 매체와 혼동하신 것 같다." "아니다. 영상 26초 부분을 봐라." "사실 확인 후 다시 말씀드리겠다." "지금 당장 확인해봐라." 공방이 이어지던 그때 한 활동가가 휴대폰을 기자에게 내밀었다. 박 대표가 딸의 얼굴이 여과없이 나왔다고 언급한 영상을 틀어준 것처럼 보였다.
잠시 휴대폰을 바라보던 기자는 "그런 의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박 대표는 "공식적으로 사과부터 하시라"며 "앞으로 이 매체의 질문에는 모두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고 답변하겠다"고 날을 세웠다. 기자는 "이미 그렇게 말씀하고 계시다"고 응수했다. 그야말로 피해자만 있을 뿐 가해자는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박 대표의 기자회견장에서 빈번히 들을 수 있었던 '그럴 의도는 없었다'는 말은 우리가 얼마나 쉽게 '아이히만'이 될 수 있는지를 말해주는 듯 했다. 아이히만 역시 '명령이라서', '내 손으로 직접하지 않으니까', '조국을 위해' 등의 합리화를 통해 자신의 일이 얼마나 잔혹한 결과를 불러올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았다.
간담이 서늘해졌다. 너무도 평범히, 누구든, 언제든 악이 될 수 있었다. 필자 또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보도 윤리는 잘 지켰던가, 어제 동료한테 뭐라고 했더라.' 기자회견장을 나와 이동하는 내내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려 '정당한 이유'를 들먹이며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지는 않았는지를 되짚어야만 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그 어느 때보다도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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