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한 여론 수렴 없는 조례에 승객과 버스 기사 혼란만 가중시켜
[더팩트|서울역=변지영 기자] 지난 9일 오후 6시 서울역 버스환승센터.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들로 분주했다. 버스가 정류장 앞에 서자 몇몇 승객들은 손에 들고 있던 물병과 음료수 컵을 재빨리 쓰레기통에 버리고 버스에 올라탔다.
1시간 정도 지나자 정류장 쓰레기통 위로는 일회용 음료수 컵이 수북하게 쌓였다. 쓰레기통에 들어가지 못한 음료수 컵들은 정류장 한켠에 쌓여 '음료수 컵 탑'이 생기기도 했다. 쓰레기통 뒤편으로 '버스 내 음식물 반입 금지'를 홍보하는 노란색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이날 서울역 버스환승센터에는 바닥이나 의자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음료수 컵이 쉽게 눈에 띄었다.
지난 1월 4일 통과된 '시내버스 재정 지원 및 안전 운행기준에 관한 조례' 개정안이 이달부터 본격 시행되면서 버스 내 음식물 반입이 금지된다. 이 개정안은 승객의 안전을 위해하거나 피해를 줄 것으로 예상되는 음식물로 인한 안전 사고를 예방한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그런데 업계에선 "이 제도를 왜 만들고 시행하는지 모르겠다"고 입을 모았다. 이 개정안이 시행되기 전에도 버스 내 음식물을 반입하는 승객들은 거의 없다는 이유에서다. 사실상 유명무실한 제도로, '행정 낭비'라는 것이다.
◆업계 의견수렴 없이 '졸속'으로 만든 조례안
서울특별시버스운송사업조합(이하 조합)과 서울시 등에 따르면 개정안이 시행되기 전에도 시내 버스 음식물 반입과 관련한 시민들의 불만 문의는 거의 없었다.
서울시 교통본부 버스정책과 관계자는 "한 해에 1만8000여 건의 민원이 접수되는데, 지난해 음식물 관련 민원은 거의 없었다"고 했다.
조합 측 관계자 역시 "조례가 개정되기 전에는 버스 내 음식물 피해 관련 민원이 거의 없었다"면서 "개정되고 나서부터는 15건 중 1건 정도로 '가뭄에 콩나듯' 관련 문의가 오곤 한다. 굳이 조례 개정의 필요성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 같은 '탁상행정'적 조례안이 시행된 데는 버스 기사나 승객들의 충분한 의견 수렴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서울시 측도 현장의 의견 수렴 없이 성급하게 도입한 조례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서울특별시 교통본부 버스정책과 관계자는 <더팩트>와 통화에서 "급하게 '조례'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내부에서도 나와 시행 당시 반대가 많았다"면서 "사전에 운전 기사들과 운행사의 의견을 취합하는 등 충분한 여론 수렴을 통해 기준을 마련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조례 시행에 대한 현장의 반응은 어떨까. 지난 9일 <더팩트> 취재진은 퇴근 시간인 오후 6시부터 약 3시간 동안, 서울역 앞의 정류장에서 버스에 탑승하는 승객들을 관찰했다. 이날 버스 정류장을 거쳐간 승객들 중 음식물을 들고 탑승하는 승객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간혹 컵을 들고 버스에 올라탄 한 두명의 직장인들이 기사의 제지로 급히 쓰레기통에 컵을 버리고 다시 승차했다.
1시간 반가량이 지난 뒤에야 한 여성이 507번 버스에 절반 정도 내용물이 남아있는 음료수 컵을 들고 승차했다. 취재진도 재빨리 빈 컵을 들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 기사는 컵을 쳐다볼 뿐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았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버스에서도 승객은 한 손으로 손잡이를 잡은 채 음료수를 마셨다. 간간히 '타 승객에게 피해를 주는 뜨거운 음료 등 음식을 들고 탑승하지 말아달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 모호한 '반입 금지 음식물' 기준에 혼란스런 승객들
조례에 따르면, 버스 기사는 음식물을 가지고 탑승하는 승객의 탑승 제한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버스 기사들은 해당 조례안의 '음식물 반입 금지 기준'이 모호해 실효성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명확한 기준이 없다보니 기사들 재량껏 승객들의 탑승을 제재해야하는 상황이라 난처하다는 것.
앞서 507번 버스를 운행한 기사 정모(58) 씨도 "기준이 애매해 기사들 사이에서도 반입 가능한 음식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면서 "오히려 조례가 승객들과 버스 기사들 사이의 실랑이만 키우는 것 같다"고 난감함을 표했다.
실제 조례안에는 '불결·악취 물품의 운송을 거부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을뿐 어디에도 음식물 반입을 금지하는 구체적인 예시나 기준은 언급돼 있지 않았다. 정류장에 부착된 음식물 반입 금지 안내문과 버스 내 안내 방송에서도 구체적인 금지 기준을 찾을 수 없었다.
이처럼 같은 음식물을 들고 타더라도 버스 기사의 재량에 따라 제재 수위에 차이가 나자 승객들도 혼란스럽다는 입장이다.
매일 저녁 서울역에서 버스를 탄다는 이현식(29) 씨는 "햄버거를 포장해 탔는데 버스 기사가 반입이 안된다고 승차를 거부했다. '어제는 가능했는데 오늘은 왜 안되냐'고 묻자 기사가 '버스 기사마다 다를 수 있다'고 말해 황당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승객 강성광 (35)씨는 "지난 8일 버스를 기다리던 중 앞 차에서 캔 음료를 소지해 승차를 거부 당한 승객이 후속 버스에서는 승차가 허용되는 경우를 목격했다"면서 "어떤 것이 맞는 것이냐"며 의아해 하기도 했다.
반입 기준이 들쑥날쑥하자 기준에 대한 시민들의 문의도 늘었다. 서울시 다산콜센터 교통민원팀의 한 상담원은 "최근 '어떤 음식물까지 반입 되는 것이냐'는 질문부터 '취식이 아니라 포장해 가져가는 것인데도 탈 수 없느냐', '경기도에서 탄 버스가 서울까지 가면 어떻게 되는 것이냐'는 등 조례에 대한 질문이 늘었다"고 전했다.
일부 승객들은 조례가 개정되고 난 뒤 오히려 정류장 주변이 넘치는 쓰레기로 어수선해졌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 강제성 없는 '승차 거부' 권한에 버스 기사들 '난감하네'
버스 내에 음식물로 인한 사고가 발생할 경우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지도 문제로 드러났다. 만약 음식물을 든 승객을 태웠다가 갈등 상황이 발생하기라도 하면 '안전운행 조례를 준수하지 않았다'는 명목으로 버스 기사가 과실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조례안에 따르면, 승객이 음식물을 가지고 탑승하는 경우 버스 기사의 승차 거부 권한이 의무 규정이 아닌 재량 규정이기 때문에 과태료를 무는 등의 강제성은 없다. 때문에 버스 기사들 사이에서는 조례가 버스 기사에게 현실과 동떨어진 권한과 책임만 전가한다는 불만도 나온다. 승객과의 소모적인 마찰로 운행에 차질을 빚기 싫어 음식물을 든 승객들을 모른 체 한다는 기사들도 있었다.
은평구 차고지에서 차를 정비중이던 버스 기사 조모(39) 씨는 "승차 거부를 했음에도 승객이 항의할 경우, 과태료 등 법적인 강제성은 없어 마찰이 불가피하다"면서 "마찰이 생기면 차량 운행도 늦어지는 등 문제가 발생해 완강히 거부하지 못한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또 다른 버스 기사 한모(54) 씨는 "기사에게 탑승 금지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볼까 봐 찜찜하더라도 강력하게 승차를 제한하고 있다"고 전했다.
버스 기사들 사이에서는 '제재 권한이 애매한 상태라 기사들 사이에서 괜한 불똥을 피하고 보자'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등 조례안의 실효성 제고를 위한 대책마련이 필요한 상태였다.
◆시민 대부분 "왜 만들었나" 의문…조례 개정안 발의 유광상 "개괄적 여론수렴 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제도의 도입 취지 자체에 대해 의문을 갖는 시민도 있었다. 직장인 강한결 (35)씨는 ""음식을 들고 타는 사람이 아직도 있느냐"면서 "6년 가까이 서울 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했지만 음식을 취식하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기사들에게 승차 거부를 시키는 등 시민이 지켜야 할 예의를 법으로 규제하는 것은 행정 과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조례 개정안을 발의한 유광상 의원은 <더팩트>와 통화에서 "당시 개정안 발의는 개괄적인 여론을 수렴해 결정한 것"이라면서 "실제로 불만 민원의 통계치는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또 유 의원은 "버스 기사의 승차거부 권한에 강제성을 두지 않은 것은 이 조례가 시민의 성숙한 의식으로 지켜나갈 사안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라며 "시행 초기인 만큼 현장의 반응을 살펴 반입 음식물의 범위라던지 큰 틀에서 보완책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hinomad@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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