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국회=김소희 기자] #1. 태국인 여성 A씨는 90일 단기체류 자격으로 한국에 들어와 마사지숍에 취업하면 150만∼200만 원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한국행을 선택했다. 부푼 마음을 안고 위치도 모르는 대구의 한 마사지숍에서 일을하게 됐다. '3개월만 마사지 일을 하고 다시 태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한국과 태국 중개업소의 말만 철썩같이 믿었다. 그러나 A씨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사장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하루에 남성 5∼7명을 대상으로 성매매를 할 것을 강요받았다. "마사지 일만 하는 줄 알고 왔으니 돌아가겠다"고 말하자 돌아온 건 "항공료와 중개수수료를 합쳐 1000만 원을 내놓으라"는 사장의 협박이었다. 돈을 벌려고 왔는데 빚에 내몰리게 된 것이다. 못 내겠다고 하자 사장은 "태국의 가족에게 알리겠다"고 A씨를 협박했다.
#2. 한국으로 시집간 딸의 산후조리를 위해 방한한 베트남 여성 B씨. B씨의 여동생도 한국 남성과 결혼하고 한국에 살고 있었다. 여동생의 요청으로 농사일을 도우러 간 B씨는 사돈(여동생 시아버지) 친구에게 강간을 당하고 말았다. B씨가 강간을 당하는 동안 사돈은 막아주지는 못할망정 망을 봐줬다. 큰 충격을 받은 B씨는 재판 과정에서 가해자의 얼굴을 보고 피해 경험을 반복 진술하는 고통을 겪었다. 이 같은 2차 피해로 B씨는 낯선 사람을 두려워하고 퇴행적 이상행동까지 보이게 됐는데도 가해자 자녀들은 집요하게 합의를 요구했다. B씨는 병원 입원치료를 받게 됐다. 뿐만 아니라 성폭행을 당했다는 것이 고향에 있는 베트남 가족에게 알려지면서 온 가족은 다른 지역으로 이사해야만 했다.
#3. 캄보디아 여성 C씨는 2016년 취업비자로 한국에 들어온 지 두 달도 되지 않아 성폭행을 당했다. 일도 서툴고 한국말도 잘 모르고 주변 지리에 어두운 상태에서 사장이 가자는 대로 따라갔다가 피해를 본 것이다. C씨는 이 사실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는 것이 부끄러워 누구한테도 얘기하지 못했다. 무서운 마음이 들고, 모든 것이 억울했지만 넘어가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주문했다. 사장은 그 뒤로도 C씨를 향한 성폭행과 성추행을 그치지 않았다. 싫다고 거부해도 소용 없었다. C씨는 더이상 '지옥'에서 살 수 없다는 생각에 사촌언니에게 도움을 청했다. 사촌언니의 도움으로 이주여성 쉼터에 입소한 C씨는 법률 지원을 받아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다.
한국에 거주하는 여성 이주노동자들은 성폭력·성추행 피해를 입어도 즉각적으로 그리고 제대로 호소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열풍이 거세게 일고 있어도 여전히 그들은 당당히 얼굴을 드러낼 수 없는, 우리사회 가장 약한 존재다.
9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제4간담회장에서 언급된 '이주여성들의 미투(Me Too)' 사례들은 이주여성을 가로막고 있는 높고 견고한 현실의 벽을 여실히 보여줬다.
이날 피해 당사자들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사례를 전한 발제자들은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대구이주여성인권센터, 서울이주여성상담센터 등에서 통·번역, 상담 등을 하며 피해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회를 맡은 강혜숙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공동대표는 "상담자들에게 이주여성 성폭력 피해 사례 접수는 일상에 가깝지만 피해자의 신분 노출은 걱정해야 하는 현실"이라며 "피해 당사자에 대한 직접 취재 역시 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발제자들은 이주여성들이 '미투' 대열에 가세하기 힘든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에서 10년째 상담, 통번역, 폭력피해 이주여성과 자녀 인권증진 활동을 하고 있는 레티마이투 씨는 A씨 사례를 소개하며 "한국 사회에서 불안정한 체류를 하고 있는 이주여성들은 이주, 여성이라는 이중 차별을 겪고 있다"며 "한국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에서 왔으니 함부로 해도 된다는 인종, 여성 차별로 인한 피해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수많은 이주여성들은 한국 국적이 없는 상태에서 불안정한 체류를 하고 있어 성폭력 피해를 받아도 끝까지 싸울 수 없다. 레티 씨가 전한 형부에게 성추행을 당한 또 다른 베트남 여성 역시 불안정한 체류로 인한 피해 사례를 보여주고 있었다.
레티 씨는 "이 여성은 한국 남성과 결혼한 언니의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한국에 왔는데 형부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며 "자녀 3명을 키우고 있던 언니는 동생과 아이들을 데리고 쉼터에 입소했지만. 이혼하면 자녀들에게 아버지가 없어지고 남편에 의존해야 체류 연장을 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결국 귀가를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결혼이주여성은 가족이 해제되면 지원과 보호를 받을 수 없다. 남편의 신원보증이 있어야 체류연장을 할 수 있고, 체류 기간이 만료될 시 미등록(불법체류자) 신분이 되기 때문이다. 또 법으로는 이주여성 혼자서도 체류연장, 한국 국적이나 영주권 신청이 가능하다고 돼있지만, 확인 절차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레티 씨는 "폭력 피해를 입고도 참고 사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자녀가 없는 결혼이주여성은 배우자의 귀책사유로 이혼판결을 받아야 한국에 체류할 수 있는데, 한국어가 서툰 이들에겐 어려운 일이다. 레티 씨는 "배우자의 신원보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이주여성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고, 남편이나 시집가족이 체류에 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주여성이 자신을 보호하기 어렵게 만든다"고 꼬집었다.
직장을 가진 이주여성에겐 '고용허가제'가 족쇄로 작용했다. C씨의 사례를 소개한 캄보디아공동체 소속 캇소파니 씨는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미투운동이 이주여성노동자들에게 함께 외쳐지기 위해서는 고용허가제가 개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용허가제는 2004년 8월 외국인의 국내 고용을 지원하고 이주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을 개선해 불법 체류자를 줄인다는 취지로 시작됐다. 하지만 이주 노동자는 국내에서 체류하는 3년 동안 사업장을 3번만 바꿀 수 있다. 또 이주노동자가 사업장을 변경할 때 사업주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즉, 성폭력 피해를 입은 이주여성이 사업주의 동의 없이 사업장을 이탈하면 불법체류자 신세가 돼버린다.
사업주가 가해자이거나 동료가 가해자인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주여성은 스스로 성폭력 피해를 입증해야 사업장 변경이 가능하다. 이주여성은 성폭력 피해를 입은 사실을 증명해내야 하지만 한국어도 잘 못하고 한국의 법도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피해증거를 모으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피해자는 가해자가 있는 사업자에서 계속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놓이게 된다. 또 입증하지 못하면 가해자로부터 '무고죄'로 고소 당할 수 있다.
이주여성은 성폭력 피해를 입어도 말조차 꺼낼 수 없다. 최근 국가인권위원회와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이 2016년 여성 이주노동자 385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에 따르면 성폭행·성희롱 피해를 당한 여성 이주노동자들 중 인권단체의 도움을 받아 대응한 사례는 6.7%, 노동부에 신고한 경우는 2.2%에 불과했다. 모름·무응답이 48.9%로 거의 절반에 달했다. 말로 항의하거나 참는 경우는 각각 24.4%, 15.6%였다.
유엔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규약 위원회(사회권위원회·UN Committee on Economic, Social and Cultural Rights)는 지난해 10월 한국 정부에 이주노동자의 인권 상황을 개선하라는 강력한 권고를 했다. 위원회는 "한국의 고용허가제는 이주노동자들이 사업장을 변경할 때 사용자에게 종속되게 하고 사업장 변경을 제한한다는 보고가 있다"며 사업장 변경 제한 규정 폐지를 요구했다. 그러나 바뀌는 건 없었다.
2차 가해 가능성도 이주여성의 입을 막았다. 대구이주여성인권센터의 니감시리 스리준 씨는 "마사지업소에서 성매매를 강요당한 여성들이 고통을 호소하면 주변에서 '그것도 모르고 취직했느냐'라고 비난한다"며 "이것은 분명히 '2차 가해'"라고 지적했다.
이주여성들은 입을 모아 지지와 연대를 호소했다. 니감시리 씨는 "이주여성들은 돈만 벌기 위해 한국에 온 것이 아니다"며 "결혼으로, 노동으로 한국에 온 길은 달랐지만 인간답게 살기를 원한다. 함께 해달라. (이주 여성에게) 용기와 지지를 보내달라"고 했다.
ksh@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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