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임태순 칼럼니스트] 우리나라가 ‘IMF(국제통화기금) 체제’를 겪은 지 어느덧 20년이 됐다. 며칠 전 각 신문들이 당시 벌어졌던 ‘금모으기 운동’ 등을 다루며 IMF 20년을 회고했다. IMF 체제는 익히 알고 있는 대로 우리나라가 빚을 많이 져 국제 금융기관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고 대신 그들에게 경제주권을 내준 것을 말한다. 빚쟁이가 됐으니 돈을 빌려준 사람이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부실기업에 대한 대출을 끊으라면 끊고, 구조조정을 하라면 그대로 따라야 했다. 돈줄이 끊긴 회사나 사업체는 도산하고 실업자가 대량으로 쏟아져 나왔다.
IMF와 산은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IMF체제로 많은 사람들이 실의와 좌절에 빠져 있을 때 버팀목이 되어 준 게 산이다. IMF가 요구하던 혹독한 구조조정에 의해 하루 아침에 직장을 잃거나 사업을 하다 망한 사람들은 눈을 떠도 갈 곳이 없었다. 친구, 직장동료들을 만나 술 한잔 하며 신세한탄도 해보지만 그 것도 한 두 번이지 매일 그럴 수는 없었다. 호주머니 사정도 어려웠다.
그 때 탈출구가 산이었다. 산은 멀리도 아닌 가까이에 있었고, 어디에도 있었다. 돈도 많이 들지 않았다. 만 원 짜리 한 장이면 충분했다. 산은 아버지들의 울분과 분노, 원통을 말없이 보듬어줬다. 산을 오르면 막혔던 응어리가 풀어지고 마음이 어느 정도 진정됐다. 힘들어도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면 어느 듯 정상이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는 것을 산에서 배웠다.
그들은 산에서 위로와 위안을 받았다. 힘들고 어려울 때 사람들은 산으로 들어간다. 그 때 우리들은 낮에는 산속에서 살았으니 절반의 ‘도시 화전민’이었던 셈이다. 산은 여기에 더해 건강도 덤으로 줬다. 만약 우리나라에 산이 없었다면 그 때 많은 사람들이 화나 분노를 삭이지 못해 정신병자가 됐을 것이다.
언론사도 IMF의 파고를 피해갈 수 없었다. 급여가 깎이고 구조조정이 단행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토요일을 쉴 수 있게 된 것이다. 경비절감 차원에서 일요일 신문을 내지 않는 바람에 토요휴무가 실시됐다. 세상은 어수선하고 주머니가 가벼울 때 반겨준 게 산이다. 선후배 동료들과 땀을 흘리고 막걸리 한 잔 나누면 다시 힘이 쏟고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그 때 산을 오르면서 YS(김영삼 전 대통령의 영어 이니셜)가 5공화국 시절 등산을 한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게 됐다. 당시 YS는 정치 피규제자로 묶여 정치활동이 금지됐다. 정치인들이 정치활동을 할 수 없게 됐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울화가 치밀었을까. 이럴 때 그는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을 결성,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산을 올랐다. 산에서 울분을 달래고, 단결과 결속력을 다지고, 건강까지 챙겼으니 일석삼조였다. 산을 타며 어려운 시절을 견디었으니 ‘정치적 화전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알게 모르게 어려울 때 우리를 지켜주고 힘이 되어준 게 산이다. 모든 것을 잃어 가진 게 없는 약한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곳이 산이다. IMF때 산을 찾으면서 사람들은 물질적 소유, 풍요가 없이도 얼마든지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소박한 행복’을 배웠다. 앞으로도 우리들에게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 곁에 산이 있기에 두렵지 않다. 산의 소중함을 깨닫게 한 게 IMF다. 그래서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산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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