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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김하란사, 45세 나이에 의문사…진실은?

  • 연예 | 2015-12-06 12:12

김하란사, 여성 독립운동계의 한 획을 그은 분
김하란사

[더팩트ㅣ김혜리 기자] 여성 독립운동가 김하란사의 업적이 재조명받고 있다.

김하란사는 1875년 평양에서 김병훈과 이씨 부인사이에 1남 1녀중 장녀로 태어났다.

김하란사는 인천에서 감리로 활동하던 하상기와 혼인 후 기혼자는 입학할 수 없었던 이화학당에 직접 찾아가 프라이 학당장을 설득해 입학했다.

그의 학구열은 위 일화처럼 대단했다. 김하란사는 1894년 이화학당 입학 후 1년간의 과정을 마쳤다. 이듬해인 1895년 3월 그는 당시 한국여성 최초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김하란사는 게이오의숙에서 1년간의 과정을 마치고 1896년에 귀국했다가 1897년 미국 유학의 길에 올랐다.

미국 유학은 김하란사에게 독립 운동을 하게 된 결정적 계기를 심어주었다.

1900년 오하이오주에 위치한 웨슬리안 대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6년의 과정을 이수한 그는 1906년년에 한국여성 최초의 문학사 학위를 수여받으며 졸업했다.

당시 웨슬리안 대학교에서 수학하고 있던 의친왕을 만난 김하란사는 이러한 인연이 계기가 되어 고종황제가 파리강화회의에 의친왕과 함께 김하란사를 밀사(密使)로 파견하기로 결정한 배경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하란사는 귀국 후 여성 문제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는 이화학당 교사였던 이성회가 조직한 이문회라는 학생단체를 지도하면서 민족의 현실과 세계정세를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이후 그는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김하란사는 경술국치 이후 국권회복을 위하여 독립운동가들과 긴밀한 연락관계를 유지하였으며, 능통한 영어실력으로 여러 선교사들과 특별한 친분관계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궁궐에 자주 입궐하면서 고종황제의 통역을 담당했다.

또한, 김하란사는 국권회복을 위한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손정도 목사를 만나러 베이징행에 갔지만, 손 목사의 병세로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1919년 4월 10일 김하란사는 동포들이 마련해준 환영 만찬회에서 먹은 음식을 먹고 45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당시 김하란사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던 미국 성공회 책임자 베커가 김하란사의 시신이 검게 변해 있었다고 증언, 현재까지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sseoul@tf.co.kr
사진 = 주간현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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