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ㅣ 강일홍 기자] "몇달 전만 해도 집에서 설겆이 하던 아줌마들이 음반내고 방송에 나와 노래를 부릅니다. 가수로서 역량이 안되는 이런 분들이 1년이면 수백명씩 쏟아집니다. 그리고 인기가수들 사이에 끼어 버젓이 가수 행세를 합니다. 돈을 주면 누구나 기준도 없이 마구잡이로 출연시켜주는 그릇된 관행 때문이죠."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을 지나다보면 이색 시위 장면이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붙든다. 팻말을 들고 1인 시위에 나선 주인공은 트로트 가수 T씨다. 30년째 무명가수다. 그가 들고 있는 팻말을 보니 '방송출연 미끼로 금품수수 웬말이냐' '허울좋은 성인가요 전문방송 표방으로 가수들은 다 죽는다' 등 내용도 원색적이다.
그 사연이 궁금해 가던 길을 멈추고 몇마디 얘기를 들어봤다. T 씨는 "트로트 가요계가 지난 수년간 성인가요방송 채널의 그릇된 관행 때문에 무너지고 있다"면서 "여러차례 진정도 하고 개선을 촉구했지만 시정될 기미가 없고 가수들의 좌절만 커져 직접 시위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얘기인즉슨 일부 케이블 성인가요채널이 신인가수들한테 공공연히 돈을 받고 방송에 출연시켜준다는 것인데 정말 '그런 일'이 가능한지 궁금하기는 했다. 좀더 귀를 기울여보니 누구나 음반을 낼 수 있는 현실에서 가수 자질이 되든 안되든 돈만 있으면 언제든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것이고, 이 때문에 출연료로 생계를 이어가는 기성 가수들이 갈 곳이 없다는 얘기였다.
실제로 일부 성인가요 전문채널들은 지자체 행사를 방송할 경우 대중에게 이름이 알려져 있는 인기가수에게만 출연료를 주고, 신인 또는 무명 가수에겐 '얼굴 알릴 기회'라는 구실로 출연료를 지급하지 않는다. '돈을 주고라도 방송에 출연하고 싶은' 가수들이 줄을 서는 현실을 악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대목이다.
현숙이나 태진아 설운도 배일호 등 인지도가 있는 인기가수들도 불만이 생기는건 마찬가지라고 한다. 턱없이 줄어든 출연료 때문이다. 일반 지자체 행사의 경우 500만~800만원의 페이를 받는 가수라도 방송사가 끼면 출연료 명목의 150만~200만원 선에 그친다. 스타급 가수들 사이에서는 이 또한 행사의 '구색갖추기 또는 들러리'라는 자조섞인 말도 들린다.
트로트는 한국 대중가요의 가장 포괄적인 장르다. 서민들과 애환을 함께 하며 늘 우리 민족의 아픔과 한을 담았고, 환희와 기쁨으로 표현됐다. 암울했던 시기에 '봉선화' '목포의눈물' 황성옛터'를 시작으로 해방과 6.25를 거치며 '귀국선' '굳세어라 금순아' '가거라 삼팔선아'로 이어졌고, 70~80년대 포크록으로 전성기를 이뤘다.
이미자 문주란 정훈희 패티김 혜은이 남진 나훈아 송창식 양희은 조용필 정수라 이용 최진희 주현미 심수봉 김수희 등이 대중적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가요전성기를 이끈 데는 무엇보다 전국을 커버하는 지상파 TV와 FM 라디오 등 대중 매체의 기능과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케이블과 종편 등 채널이 기하급수로 늘어난 지금 오히려 트로트는 더 외면을 받고 있다. 갈 곳을 잃은 성인가수들이 눈을 돌리는 곳은 지역 방송 뿐이다. 대중과 소통할 소구력은 극히 미미하지만 '신곡을 소개할 무대도, 존재감을 확인해줄 매체도 없는 현실'에서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대중가요의 활성화는 '전국노래자랑'의 경우에서 보듯 평범한 이웃 서민들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고 활력을 되찾는 일이다. 남진 송대관 태진아에 이어 최근 대한가수협회장에 취임한 김흥국은 "시청률이나 청취율에 매몰될 게 아니라 장기적인 안목에서 가요프로그램이 제작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개탄했다.
"모든 방송사 프로그램이 아이돌 천국이다. 트로트 가수들이 설 자리가 없다. 지상파 방송의 경우 기껏해야 '가요무대' '전국노래자랑' '6시 내고향' 등 손에 꼽을 정도다. 신인가수들이 자신의 곡을 알릴 곳이 없으니 출연료는 안받아도 방송에 나가게만 해달라고 매달린다. 부작용이 안 생긴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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