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중심, 낙엽처럼 가버리는 것
'문학의집 서울'로 사용하다 지난해부터 방치돼 '폐가' 수준
[더팩트 | 이광희 기자] 남산의 부장들은 과거 군사정권에서 막강한 권력자들이었다.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의 말로는 그리 신통치 않다.
더욱이 살아생전 권력을 만끽했던 이들일수록 그랬다. 조용하게 본인의 임무에 충실했던 이들은 세인들의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남산의 부장으로 불렸던 중앙정보부장 공관은 서울 명동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남산의 끝자락, 서울시 중구 퇴계로26길에 붙어있다. 굴다리를 지나 좁은 길로 들어서면 남산이 발을 드리운 숲속에 있다. 밖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중앙정보부장으로 두드러지게 기억을 반추하는 사람은 김형욱이다.
그는 1961년 36세의 나이로 5.16 군사 쿠데타에 참여했다. 당시 중령으로 적극 가담함으로써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이 됐다.
이어 1963년 청와대에 뒤를 이어 권력 서열 2위라고 했던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했다.
그는 정권에 충성했다. 그 덕에 그는 6년이 넘는 기간 남산의 부장으로 있었다. 1969년 밀려났지만 국회의원으로 정치 생명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듬해에 있은 10월 유신으로 그마저 어렵게 되자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그곳에서 박정희 정권의 비리를 폭로했다. 그 유명한 '코리아게이트'였다.
1976년 10월 24일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는 그의 폭로를 단독으로 보도했다. 내용은 박정희 정권에 치명적이었다.
로비스트 박동선과 한국 중앙정보부가 미국 상·하원과 고위 관계자들에게 매년 현금을 살포했다는 내용이었다. 현금 규모는 50만 달러에서 100만 달러에 달했으며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라고 했다.
김형욱은 1977년 미국 하원에 출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폭로를 이어가기 위해서였다. 불법 로비뿐 아니라 박 정권의 인권탄압 문제도 폭로했다. 2차 위원회에 출석한 그는 박 전 대통령을 '박정희 씨'라고 호칭했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 ‘혁명과 우상’을 집필하면서 박 정권과 일종의 거래를 계획했다. 그 계획은 실행에 옮겨지는 듯했다.
그는 1979년 10월 자서전 원고를 넘기는 대가로 거액을 받기로 약속했다.
다만 대가를 받는 장소는 프랑스 파리였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10월 7일 행방불명됐다. 감쪽같았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19일 뒤인 10월 26일 박전 대통령마저 비운에 스러져갔다. 당연히 김형욱 실종은 더 큰 사건에 가려 세인의 기억 속에서 잊혀버렸다.
2005년 국가정보원 ‘과거사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는 그가 권총으로 살해당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당시 작전에 투입됐다고 주장한 전 중정 요원은 주간지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김형욱을 파리 근교 양계장에서 분쇄기에 넣어 죽였다고 폭로했다.
이 공관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했던 김재규도 손때를 묻혔다.
그는 1979년 박 전 대통령을 시해함으로써 유신체제의 막을 내리게 했다. 그는 5.16 군사 쿠데타 후에 계엄군을 이끌었으며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1976년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한 뒤 점차 대통령의 신뢰를 잃은 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만찬 도중 박 전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살해했다. 결국 신군부가 들어선 1980년 5월 24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1980년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할 때 30경비단장으로 쿠데타에 가담한 장세동 국가안전기획부장도 이곳에 기거했다.
그는 전두환 정권의 수호자 역할을 자임했던 인사다. 전통의 심기 경호를 펼쳤던 인물로 유명하다. "대통령의 마음이 편해야 국정도 잘되니 심기까지 경호해야 한다"고 전한다.
그는 "각하께서 산책하시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 심기가 불편해지신다"며 전통이 산책하던 청와대 내 도로 평탄화 작업을 지시했다고 한다. 그는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노출되면서 6월 항쟁의 밀물에 밀려 물러났다.
권력의 2인자 노릇을 한 중앙정보부장, 안전기획부장이 머물렀던 집이 남산공관이다.
서울시는 1996년 이 공간을 매입했다. 남산 한옥마을 조성 등 남산 제모습찾기 사업을 추진했다. 이 사업의 일환으로 2001년 7월 유한킴벌리(주)와 서울시의 지원으로 이 공관을 개보수했다. 그해 10월 개관하고 '문학의 집 서울'이라고 이름 붙였다.
대지 793.7㎡, 건물 연면적 491.94㎡로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이다. 본관 1층은 세미나실과 자료정보실, 전시장으로 사용했다. 2층에는 문인들의 사랑방과 회의실, 집필실 등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하지만 서울시는 지난해 3월 본관 점검과 보수를 이유로 운영을 중단했다. 언제 재개관을 할지는 미지수다. 별도 안내 때까지 운영을 중단한다는 안내문만 현관 유리문에 붙여 놓았다.
사용하지 않는 집은 폐가나 마찬가지다. 1년 7개월이 지나도록 손을 대지 않아 보는 게 을씨년스럽게 한다. 지하로 들어가는 외부 계단에는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시 읽는 방으로 이름 지어진 지하 문학인 카페도 문을 닫은 지 오래다. 거미줄만 빈집임을 일깨운다.
낙엽이 지는 가을에 단풍이 곱지만 떨어지면 무상하다. 이 공관을 거친 인사들이 낙엽처럼 떨어져 간 사실을 지금 권좌에 있는 이들은 알는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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