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중궁궐에 갇힌 尹, 쓴소리 경청해야
대통령실 "매 먼저 맞았다"…국정운영 기조 변화 시사
[더팩트ㅣ용산=박숙현 기자] "이번 선거 결과로 바뀌면 기사회생하는 거고, 가만히 있으면 다 죽는 거다."
선거 전략에 능통한 한 여권 관계자는 10·11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참패 후 내년 22대 총선 전망을 묻자 이렇게 말했다. 기초단체장 1곳일 뿐이며 원래 국민의힘 험지였다는 '핑계'를 대기엔 예상보다 표 차이가 컸다. "서울시장 보궐 선거를 거쳐 대선과 지선을 걸쳐 쌓아 올린 자산이 완벽하게 리셋됐다"는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의 분석처럼 '영남당'으로 다시 후퇴한 게 아니냐는 여권의 우려가 크다.
겉으로 볼 때 대통령실은 조용하다. 선거 다음 날 PG(Press Guidance·언론대응)로 "어떤 선거 결과든 엄중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한 줄 냈을 뿐이다. 대변인 브리핑도 없었다. 하지만 달라진 기류도 흘러나왔다. '주식 파킹' '인사청문회 중도 퇴장' 논란이 일었던 김행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지난 12일 자진 사퇴한 것이다. 국민의힘 비공개 최고위 회의에서 김 후보자 자진 사퇴를 대통령실에 건의했고, 그날 오후 김 후보자가 입장문을 냈다.
정치권에 따르면 당초 김 전 후보자는 선거일 전 먼저 사퇴 의사를 밝혔으나 당 지도부 일부 인사가 만류했다고 한다. 선거 참패가 예견돼 '분위기 전환용'으로 김 전 후보자를 '희생양' 삼았다는 우스갯소리도 들린다. 비대위 체제 전환 요구 등 당 지도부가 흔들릴 위기에 처하자 여당이 김 후보자 '지명 철회'를 건의하고 윤 대통령이 이를 수용하는 모양새로 '지도부 교체론'을 가라앉히고 당 지도부를 재신임한 꼴이 됐다.
이번 패배의 원인은 많겠지만 가장 큰 원인을 꼽자면 대통령실의 '불통'을 꼽는 사람이 많다. 윤석열 대통령은 김태우 후보가 공무상 비밀누설 혐의로 징역형이 확정돼 강서구청장직을 상실한 지 석 달 만에 특별사면을 해줬다. 국민의힘은 '자신들의 귀책으로 발생한 재보궐선거에는 후보를 추천하지 않는다'는 당규까지 바꿔가며 김 후보자를 유권자에게 내밀었다.
보궐선거 원인 제공자가 바로 보궐선거에 재출마하는 경우는 유례없는 일이다. 이와 관련, 국민의힘 선거 전략팀은 이미 자체 여론조사 분석 등을 통해 3~4개월 전부터 '강서구청장 보궐선거가 큰 격차로 질 것으로 예상되니 무공천해야 한다'는 취지로 보고서를 작성해 당 지도부와 대통령실에 보고했다고 한다. 실제로 국민의힘도 8월 말까지 '공천하지 말자'는 쪽이었지만 지난달 초 김 후보자를 공천하는 방향으로 기류가 달라졌다. 여당과 대통령실 간 소통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고 있거나, 대통령실이 다 인지하고도 오판한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구중궁궐'을 떠나겠다며 용산 시대를 연 윤 대통령은 오히려 더 깊숙이 갇힌 듯하다. '소통'의 상징이었던 출근길 문답(도어스테핑)은 흐지부지 잠정 중단된 지 1년이 되어가고, 민주화 이후 '집권 2년차에 신년 기자회견과 취임 1주년 기념 기자회견, 영수회담을 모두 건너뛴 최초의 대통령'이라는 부담스러운 타이틀도 얻었다. 대통령실은 취임 기념 기자회견을 조만간 열겠다며 출입기자들을 달랬지만 정치 현안이 불거질 때마다 뒷순위로 밀렸다. '대통령의 입' 대변인 브리핑도 자주 열리지 않는다.
윤 대통령은 어디에서 누구로부터 '진짜 민심'을 파악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최근 윤 대통령이 자주 발길을 향하는 곳은 한국자유총연맹, 재향군인회 등 안보 분야 시민단체 창설 기념식이나, 인천상륙작전과 장진호전투 등 6·25 전쟁 승리 기념식 등이다. 이 자리에서 한 참석자로부터 "친히 왕림하시었다"는 극존칭을 듣기도 했다. 어깨가 올라갈 만하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는 보궐선거 당일 자신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서 "대선 때 (윤 대통령을) 이상한 데 인사시키길래 그렇게 하면 대선 진다고 저는 목숨 걸고 싸웠다. 제발 사람 만나고 지하철 가서 인사하고 정상적인 선거운동을 하자고 했지만 그걸 내부총질이라고 해서 이 꼴을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상대 진영과 다퉈야 하는 대선 때보다 국가 통합과 번영이 최우선 목표인 국정운영은 훨씬 더 긴 호흡과 힘을 들여 균형을 맞춰야 하는 일이다. 쓴소리하는 사람들을 가까이 두면서 다양한 계층과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 경청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대통령실 내부에선 이번 선거를 기점으로 국정 운영 스타일에 변화를 줘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고 한다. 대통령실 한 관계자는 "윤석열 정부의 방향성은 맞더라도 태도와 인식에 있어서 불편하다고 느끼는 이들이 있었다. 이번 선거 결과로 이런 부분을 바꿔야 한다는 컨센서스(합의)가 형성됐다. 매를 일찍 맞았다. (장기적으로 보면) 오히려 (선거 참패가) 잘된 일"이라며 어느 부분을 다듬고 고쳐나갈지 논의 중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선거판에서 압승에 도취한 승자가 혁신에 게을러지고 다음 선거에선 고전을 면치 못한다는 '승자의 저주, 패자의 축복' 명제가 내년 총선에도 적용될지는 윤 대통령과 여당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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