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최정식 선임기자]
이퍼스
1946년 메이저리그 올스타전이 보스턴 레드삭스의 홈구장 펜웨이파크에서 열렸다. 경기 전 레드삭스의 강타자 테드 윌리엄스가 내셔널리그 올스타로 뽑힌 피츠버그 파이리츠 투수 트루엣 슈얼과 마주쳤다. 윌리엄스는 39세의 노장 투수 슈얼에게 "나한테 그 공 안 던질 거죠?"라고 물었다. 그러나 슈얼은 던질 것이라고 말했다.
8-0으로 앞선 아메리칸리그의 8회말 공격 때 윌리엄스의 타순이 돌아왔고 투수는 슈얼이었다. 타석에 들어선 윌리엄스는 마운드의 슈얼을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공'을 던지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슈얼은 윌리엄스의 경고를 무시하고 큰 포물선을 그리는 느린 공을 던졌다. 윌리엄스는 파울로 걷어냈다. 똑같은 공이 또 들어왔지만 볼이 됐다. 그 다음은 패스트볼. 바로 전 엄청나게 느린 공을 대했던 터라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느껴졌다. 스트라이크.
윌리엄스가 볼카운트 1-2로 몰린 가운데 또 '그 공'이 날아왔다. 윌리엄스는 허공에서 포수 머리를 향해 내려오는 공을 향해 거의 뛰어오르듯이 스윙했다. 배트에 맞은 공은 오른쪽 펜스를 훌쩍 넘어갔다. 슈얼이 '그 공'으로 허용한 첫 홈런이었다. '그 공'은 이퍼스였다.
이퍼스는 볼을 공중으로 높게 던져 마운드에서 홈플레이트까지 큰 포물선을 그리게 하는 투구다. 블루퍼라고도 불린다. 슈얼이 이 공을 개발한 것은 사고 때문이었다.
1940년 16승에 리그 3위의 평균자책점이라는 괜찮은 성적을 올렸던 그는 그 다음해 사냥을 나갔다가 다른 사람이 쏜 산탄총 탄환이 근처에서 터지면서 오른발 엄지발가락을 다쳤다. 한동안 제대로 걷지도 못했던 그는 다시 피칭을 시작했지만 중심발에 체중을 싣기 어려웠다. 그는 공을 손바닥 안쪽에 거머쥐고 오버핸드 동작으로 마치 투포환 던지기를 하듯 공을 던졌다. 핸디캡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퍼스가 탄생한 것이다.
슈얼이 이 공을 처음 던진 것은 1942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의 시범경기에서였다. 풀카운트에서 포수가 체인지업 사인을 내자 슈얼은 그동안 연마했던 자신의 새 무기를 선보였다. 타이거스 타자 딕 웨이크필드는 투수가 던진 공이 공중으로 올라갔다가 뚝 떨어지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일단 스윙을 시작했다가 멈췄고 공이 가까이 와서야 다시 배트를 휘둘렀으나 헛스윙이 되면서 삼진을 당하고 말았다. 이 희한한 광경에 관중은 물론 양 팀 선수들이 모두 폭소를 터뜨렸다.
경기가 끝난 뒤 사람들은 슈얼에게 도대체 무슨 공이냐고 물었지만 그도 아직 이름을 짓지 않은 상태였다. 외야수 모리스 반 로베이스가 '이퍼스'라고 부르는게 좋겠다고 말했다. 슈얼이 이퍼스가 뭐냐고 묻자 반 로베이스는 "이퍼스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 공도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히브리어로 '에페스'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의미한다.
시범경기에서 이퍼스로 관심을 모은 슈얼은 정규시즌 시카고 컵스와의 경기에서 또 한 번 극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1-0으로 앞선 9회 2사 만루의 위기를 맞은 슈얼은 컵스 타자 돔 다예산드로에게 풀카운트에서 이퍼스를 던졌다. 7m가 훨씬 넘는 높이로 던져진 공은 뚝 떨어지며 홈플레이트를 통과했고 다예산드로는 꼼짝 못하고 삼진을 당했다.
슈얼의 이퍼스는 야구팬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홈경기와 방문경기에 상관 없이 그가 등판할 예정인 경기에는 보통 때보다 3천~5천 명의 관중이 더 들었다. 슈얼은 이퍼스 덕분에 1943년 25경기를 완투하며 21승을 따낼 수 있었다.
슈얼이 이퍼스를 처음 던진 지 40년이 지난 뒤 뉴욕 양키스의 데이브 라로슈가 '라 로브'라는 이름으로 비슷한 공을 던져 화제가 됐다. 라로슈는 1981년 밀워키 브루어스의 슬러거 고먼 토머스에게 높게 띄워올리는 공을 던져 삼진을 잡았다. 다음 시즌 토머스를 다시 만난 라로슈는 연속해서 7개의 라 로브를 던졌는데 그 가운데 5개가 파울이 됐고 하나는 볼이 됐다. 그리고 토머스가 때린 마지막 공이 좌전 안타가 됐다. 1년 전 장난 같은 공에 삼진을 당해 모욕을 느꼈던 토머스는 1루에 출루한 뒤 주먹을 불끈 쥔 두 팔을 머리 위로 들어올리며 마치 홈런을 친 듯 환호했다.
이퍼스는 우스워 보이지만 던지기 어렵다. 큰 포물선의 끝이 홈플레이트를 통과하도록 컨트롤하는 것도 쉽지 않고, 시속 80㎞대의 스피드로 공을 느리게 던지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던져서 낼 수 있는 가장 느린 속도보다 더 느리기 때문이다.
타자가 치는 것도 힘들다. 투구의 궤적과 스피드가 일반적인 타격 메커니즘 밖에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타자가 배트 스피드가 매우 뛰어나거나 미리 예측하고 있다면 쉽게 담장 밖으로 날려보낼 수도 있다.
이퍼스의 속성은 너클볼과 거의 같다. 너클볼의 경우 최대한 공에 회전이 걸리지 않도록 해서 불규칙한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 정도가 다른 점이다. 너클볼은 타자가 무슨 공이 오는지 알고 있어도, 반복적으로 그 공을 대하더라도 쳐낼 수가 없다. 매력적인 무기지만 던지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너클볼을 제대로 구사하는 투수는 드물다. 그러나 이퍼스를 던지는 투수는 그보다 더 보기 힘들다.
비록 던지는 투수가 거의 없지만 이퍼스는 피칭에 관해 시사하는 바가 있다. 스트라이크존과 스피드다.
야구규칙에 따르면 스트라이크존은 '유니폼의 어깨 윗부분과 바지 윗부분 중간의 수평선을 상한선으로 하고, 무릎 아랫부분을 하한선으로 하는 홈 베이스 상공'을 말한다. 즉 가상의 오각 기둥인 것이다. 스트라이크존이 평면이 아닌 입체이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투구를 위에서 아래로 통과시킬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하좌우의 평면으로 인식된다. 그런 점에서 이퍼스는 가능한 한 스트라이크존을 수직에 가깝게 통과시키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워렌 스판이 말한 것처럼 피칭은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는 행위다. 대부분의 투수들은 조금이라도 더 빠른 공을 던져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으려고 애를 쓴다. 체인지업을 활용하긴 하지만 이 역시 빠른 공에 기대거나 빠른 공을 더욱 살리기 위한 방법이다. 이퍼스는 이같은 '좀 더 빠르게'에 대한 질문이다. "그렇다면 좀 더 느리게 던지는 것은 어떤가?"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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