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최정식 선임기자] 1958년 메이저리그의 명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한국을 방문해 친선경기를 치렀다. 당대 최고의 타자였던 스탠 뮤지얼이 포함된 세인트루이스와 맞붙은 '서울 대표팀'은 오윤환 감독의 지휘 아래 투수 김양중 배용섭 한태동, 포수 김영조, 야수 박현식 성기영 김진영 장태영 등으로 짜여진 사실상의 국가대표팀이었다.
한국은 선발로 배용섭을 마운드에 올렸다. 빠른 공으로는 메이저리그 강타자들을 상대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해 느린 커브를 던지는 배영섭을 내세운 것이다. 그러나 세인트루이스 타선은 배영섭의 느린 공을 프리배팅하듯 두들겼다. 1,2번 타자의 연속 안타 뒤에 뮤지얼이 2루타를 터뜨려 선취점을 올렸다.
관중석에서 "김양중 나와라"라는 외침이 터져나왔다. 김양중은 광주서중 시절인 1948년 경남중의 장태영과 청룡기 결승에서 연장 11회 사투라는 명승부를 펼친 한국의 에이스였다.
아웃 카운트를 하나도 잡지 못하고 내려온 배영섭 대신 마운드에 오른 김양중은 4번타자 켄 보이어, 5번타자 조 커닝엄, 6번타자 진 그린을 각각 플라이, 삼진, 내야땅볼로 처리해 팀을 위기에서 벗어나게 했다. 김양중은 7회까지 무실점으로 호투했고 8회와 9회에 1점씩을 허용해 결국 한국은 0-3으로 졌다.
이 경기를 앞두고 국내 야구팬들에게 예상 스코어에 대한 설문을 했는데 가장 적은 점수차가 0-20이었다. 예상 외로 선전한 것이다. 특히 김양중은 탈삼진 4개를 기록하며 빛나는 호투를 했다.
이 경기의 하이라이트는 6회 김양중이 뮤지얼을 삼진으로 잡아낸 장면이다. 이에 대해서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김양중은 뮤지얼을 상대로 원 볼, 투 스트라이크에서 스트라이크 존에 꽉 차는 공을 던졌는데 미국인 구심이 볼로 판정했다. 그 다음 김양중의 공은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났지만 뮤지얼은 헛 스윙을 해 삼진이 됐다. 뮤지얼이 오심으로 억울했을 투수에게 보인 매너로 받아들여졌다.
세기의 강타자 뮤지얼을 삼진으로 잡으며 메이저리그 팀을 상대로 호투한 김양중은 영웅이 됐다. 그해 대한체육회가 모든 종목을 통틀어 최우수선수로 선정, 시상했을 정도였다. 김양중은 후일 "20년쯤 지나 연락이 와서 서울에서 뮤지얼을 만났다. 잘 있었느냐며 반가워했고 그때 삼진 먹은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김양중은 선수 시절 오로지 직구로만 승부했다고 했다. 커브와 드롭을 던질 줄은 알았지만 직구만 던졌다는 것이다. 그런 자신의 공에 대해 "그때는 속도를 잴 장비가 없었기 때문에 얼마나 나왔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빨랐던 것 같다"고 말했다. 과연 구속이 어느 정도였을까? 1969년대 김양중 감독이 이끌던 기업은행에서 투수로 활약한 김성근 한화 감독은 "구속은 140㎞대 초반 정도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정도의 스피드가 당시에는 그렇게 치기 어려웠을까? 김성근 감독은 "컨트롤이 뛰어났고 볼끝이 좋았다. 그 분은 투구 폼이 좀 특이했는데 요즘 투수들이 던지는 것처럼 앞에서 때렸다. 그때는 이상하다 싶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이상적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김양중은 왼손 투수인 자신의 공이 타자 앞에서 '흐르는 성질' 이 있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김성근 감독은 '내추럴 투심'이라고 설명했다. 의도하고 던진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투심 패스트볼의 변화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세인트루이스와의 경기가 끝난 뒤 포수 김영조가 김양중에게 "잡기 힘든 이상한 공이 몇 개 있었다"고 말한 것도 그립에 따라 패스트볼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변화였을 가능성이 높다.
왼손 투수의 이점에 이상적인 투구 동작이 더해져 스피드가 빨라지는 효과가 있었고, '무브먼트'가 좋았으며, 제구력까지 뒷받침됐기 때문에 위력적인 투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인트루이스는 한국에 오기 전 일본에서 먼저 친선경기를 했다. 한국에서 김양중이 그랬던 것처럼 일본에서도 세인트루이스와의 경기에서 주목받은 투수가 있었다. 한신의 에이스로 그해 24승 12패, 평균자책점 1.69의 빼어난 성적을 올렸던 고야마 마사아키다.
그는 뮤지얼을 상대로 원 볼, 투 스트라이크에서 실전에서 처음 던진 공으로 삼진을 잡았다. 팜볼이었다. 고야마는 전성기 때 150㎞를 웃돌았던 속구와 공 반 개의 폭으로 스트라이크 존에 넣었다 뺐다 할 수 있는 제구력으로 유명한 투수였다. '바늘구멍도 통과할 것 같은 컨트롤'이라는 찬사를 받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힘이 떨어지면 직구와 커브만으로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자 아직 전성기일 때 레퍼토리에 추가할 새 공을 찾게 됐다. 포크볼과 너클볼 등을 시험해 보다가 팜볼을 선택했다. 당연히 평범한 플라이라고 생각한 타구가 홈런이 됐을 때 낮게, 더 낮게 던지는데 집중하면서 팜볼을 떠올리게 됐다는 것이다. 비밀리에 연마하던 팜볼을 세인트루이스 타자들을 상대로 테스트해 봤다. 메이저리그 타자들을 상대로도 통하는 것을 확인한 뒤 "좋아, 다음 시즌부터 써먹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새로운 공을 익히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어서 실제로 리그 경기에서 던진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1962년 한신은 양 리그 분리 이후 처음으로 센트럴리그 정상에 올랐다. 고야마는 27승 12패를 기록하며 한신의 우승에 기여했으나 1963년 시즌이 끝난 뒤 야마우치 가즈히로와 트레이드돼 다이마이 오리온즈로 이적하게 됐다.
고야마는 팀을 옮긴 첫해인 1964년 시즌 새로 장착한 팜볼을 본격적으로 던지며 30승을 올렸다. 몇 십 개에 하나꼴로 던졌지만 빠른 공과 대비돼 타자가 거의 칠 수 없었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의 승부구로 위력을 발휘했다. 그는 1973년까지 선수 생활을 계속하면서 통산 320승으로 일본프로야구사에 이름을 남겼다. 구위가 떨어질 때를 대비한 선견지명 덕분이었다. 고야마가 이적 후 좋은 성적을 내자 일본 야구계에서는 한신이 고야마가 팜볼을 완전히 익혔다는 사실을 몰랐으며, 알았다면 트레이드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오프 시즌에 일본과 한국을 찾았을 때 아마도 관광하는 기분이었을 세인트루이스 선수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친선경기에 임했을지는 의문이다. 앞서 베이브 루스 등을 상대했던 사와무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메이저리그의 대타자를 삼진으로 잡았다는 사실에 너무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김양중의 강속구는 메이저리그 타자들이 곤혹스러워할 정도로 빠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볼끝의 움직임과 컨트롤이 좋았다. 고야마는 150㎞의 빠른 공을 갖고 있었다고 하지만 평균 구속은 140㎞대 중후반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오른손 투수였다. 스피드에서 김양중과 큰 차이는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대신 중요한 순간에 체인지업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의 별명은 '정밀기계'였다. 두 투수의 공통점은? 제구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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