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속 1시간의 공포"…홍콩 아파트 화재 생존자가 전한 무력감


"집이 연옥된 순간, 내 몸 하나도 통제 못 했다"…젖은 수건 들고 이웃 구해

홍콩 북부 타이포 구역의 ‘웡 푹 코트’ 아파트 단지에서 화재가 발생해 32층짜리 아파트 7개 동에서 43시간이나 이어진 끝에야 진압됐고, 사망 128명·부상 79명·실종 약 200명으로 집계돼 홍콩에서 70여 년 만에 최악의 인명 피해를 낳은 화재로 기록됐다. /홍콩=AP.뉴시스

[더팩트ㅣ이선영 기자] 홍콩 북부 타이포의 고층 아파트 단지에서 발생한 대형 화재로 최소 128명이 숨진 가운데, 극적으로 살아남은 한 주민이 "연기 속 1시간의 공포"를 생생히 증언했다.

29일(현지시간)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에 따르면 이번 화재는 32층짜리 아파트 7개 동에서 43시간이나 이어진 끝에야 진압됐고, 사망 128명·부상 79명·실종 약 200명으로 집계돼 홍콩에서 70여 년 만에 최악의 인명 피해를 낳은 화재로 기록됐다.

생존자 윌리엄 리(40)는 타이포 '웡 푹 코트' 2층에 거주하는 주민으로, 자신이 겪은 참상을 SNS에 상세히 적었다. 그는 화재가 발생한 지난 26일 오후 집에서 쉬고 있다가 아내의 전화를 받고서야 아파트에 불이 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옷을 갈아입고 급히 집을 나가려 했지만, 현관문을 여는 순간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문을 열자 복도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짙은 연기에 뒤덮여 있었다. 그는 휴대전화 손전등을 켜 보려 했지만 시야는 전혀 확보되지 않았고, 숨 쉬기도 버거웠다. 결국 문을 다시 닫고 집 안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리 씨는 다시 아내에게 전화해 비상계단을 통해 로비로 대피할 수 있는지 물었지만, 아내로부터 "로비가 불바다"라는 말을 들었다. 계단 대피로마저 끊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집이라는 연옥에 갇히게 됐다. 어쩔 수 없이 무력하게 구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고 당시 심정을 털어놨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젖은 수건이라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수건에 물을 적셔 두고 있을 때, 복도에서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리 씨는 젖은 수건을 움켜쥐고 다시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연기로 눈물이 쏟아지고 목이 타들어 가는 듯했지만, 복도 벽을 더듬으며 나아가던 끝에 한 부부를 발견해 자신의 집 안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인생의 많은 일은 통제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내 몸은 내가 통제할 수 있다고 늘 생각했다"며 "그런데 마지막 남은 통제권마저 화염에 의해 무자비하게 빼앗겼다"고 말했다.

화재 발생 약 1시간이 지난 뒤, 리 씨는 창가 쪽에서 소방관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손전등을 흔들어 구조 신호를 보냈고, 결국 오후 6시께 고가 사다리를 통해 밖으로 구조됐다. 짙은 연기 속에서 버틴 1시간의 공포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리 씨는 "짙은 연기보다 더 숨 막히게 한 것은 철저한 무력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거기에 앉아 있는 것뿐이었다"고 했다. 구조를 기다리며 그는 자녀의 장난감, 아내의 애장품, 중요한 서류 등 무엇을 챙겨 나갈지 머릿속으로 수없이 떠올렸지만, 막상 대피할 때는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했다고 한다.

현재 그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당시의 경험을 온라인에 공유하고 있다. 웡 푹 코트 단지는 8개 동, 약 2000가구가 거주하는 대규모 단지로, 공사용 비계와 방화 안전 문제 등을 둘러싼 책임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당국은 이번 화재를 계기로 고층 주거단지의 안전 규정과 공사 관행, 비상경보 시스템 전반을 재점검하겠다고 밝혔다. 홍콩 정부는 29일부터 사흘간 공식 애도 기간을 선포하고 조기를 게양하는 한편, 도심 곳곳에 분향소를 설치해 희생자를 추모하고 있다.

seonyeong@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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