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서울월드컵경기장=오승혁 기자] "아…. 아깝습니다! 이강인 사인 유니폼 놓쳤습니다!"
28일 오후 '오승혁의 현장'은 로베르트 모레노(스페인) 임시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A매치 평가전을 3시간 가량 앞두고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찾았다.
손흥민, 이강인 등 글로벌 스타 플레이어들의 이름 옆에 설치된 원형 타겟에 공을 넣는 미션에 실패하자 행사 진행자의 탄식이 마이크를 타고 광장에 울려 퍼졌다. 상품으로 걸린 국가대표 이강인의 사인 유니폼을 눈앞에서 놓친 참가자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주변에서는 곧 웃음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우리도 쟤랑 사진 찍자."
경기장 광장에 등장한 대형 캐릭터를 발견한 이들은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축구 유니폼을 맞춰 입은 어린이들은 캐릭터 옆에서 손가락으로 브이(V)를 그렸고, 부모들은 조금이라도 더 좋은 사진을 남기기 위해 연신 촬영 버튼을 눌렀다.
북측 광장에는 축구를 소재로 한 여러 체험 공간이 마련됐다. 송편 모양의 공을 차서 바구니에 넣거나 언덕에 설치된 작은 홀에 공을 넣고 힘차게 차서 골대에 넣는 여러 체험들이 축제 분위기를 만들었다.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팬들의 발걸음도 계속 이어졌다. 손흥민과 이강인을 비롯한 대표팀 선수들의 이름이 새겨진 유니폼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친구와 함께 경기장을 찾은 청년과 젊은 연인부터 어린 자녀의 손을 잡은 가족까지 관람객의 연령대도 다양했다.
경기장 주변에서 마주한 풍경만 보면 한국 축구를 향한 팬심이 한동안 싸늘하게 식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기 어려웠다.
한때 축구대표팀의 A매치는 입장권을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예매가 시작되면 빠르게 표가 팔렸고 경기장은 붉은색 유니폼을 입은 관중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대한축구협회의 행정 난맥상과 홍명보 전 감독 선임 과정을 둘러싼 논란, 대표팀의 경기력 부진이 겹치면서 팬들의 시선은 차갑게 변했다. 홍 전 감독의 데뷔전부터 이어지던 매진 행진이 끊겼고 경기장에서는 당시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과 홍 감독의 사퇴를 요구하는 야유가 쏟아졌다.
관중 수에도 팬들의 실망감이 고스란히 반영됐다. 지난해 10월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파라과이전 관중은 2만2206명에 그쳤다. 같은 해 11월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볼리비아전에는 3만3852명, 서울에서 열린 가나전에는 3만3256명이 입장했다.
손흥민과 이강인 등 세계적인 무대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이 출전했지만 스타들의 이름만으로 돌아선 팬심을 되돌리지는 못했다. 경기장 곳곳의 빈자리는 한국 축구를 향한 실망과 분노가 얼마나 커졌는지를 보여줬다.
이후 한국은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탈락했고 홍 전 감독과 정 전 회장은 물러났다. 이후 모레노 감독이 임시 사령탑을 맡아 대표팀 재건에 나섰다.
이번 9·10월 A매치 4연전은 추락한 한국 축구가 다시 출발하는 첫 여정이다. 국내에서 A매치가 열리는 것도 지난해 11월 가나전 이후 약 10개월 만이다.
모레노호는 지난 24일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에콰도르를 상대로 첫선을 보였다. 경기 전까지도 새 대표팀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교차했지만 한국은 에콰도르를 3-0으로 완파했다.
새 감독 체제의 첫 경기에서 나온 세 골 차 승리는 대표팀을 둘러싼 분위기를 바꿨다. 단 한 경기의 결과만으로 한국 축구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평가하기에는 이르지만 팬들이 다시 대표팀에 관심을 가질 계기는 충분했다.
변화는 입장권 판매에서 나타났다. 우루과이전은 경기 전날을 기준으로 4만 장 넘게 판매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해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A매치 관중이 2만~3만 명대에 머물렀던 것과 비교하면 눈에 띄는 회복세다.
내달 2일 울산문수축구경기장에서 열리는 베네수엘라전은 매진됐다. 에콰도르전에서 보여준 경기력이 다음 경기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며, 냉랭했던 A매치 분위기가 반전의 흐름을 타고 있는 모습이다. 실제로 이날 서울월드컵경기장 주변은 대학가 축제 현장 등에서 느낄 수 있는 설렘이 그대로 전해졌다.
다만 이날 상대는 ‘남미의 강호’ 우루과이다.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과 역대 전적을 고려하면 에콰도르전보다 훨씬 까다로운 상대다. 모레노 감독의 축구와 대표팀의 달라진 경쟁력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첫 시험대라고 할 수 있다.
모레노 감독은 플랜 A로 예고했던 4-4-2 포메이션을 재차 꺼내 들었다. 김승규가 최후방을 맡고 이태석-김민재-이한범-설영우가 포백을 구성하며 황희찬-이재성-김봉수-이강인이 중원을 꾸렸다. 투톱으론 손흥민-오현규가 배치됐다.
에콰도르전 선발 라인업과 비교하면 조현택, 정승원, 박진섭, 송민규가 빠지고, 이태석, 황희찬, 김봉수, 이강인이 들어왔다.
주장 손흥민의 기록 도전도 관전 요소다. 손흥민은 에콰도르전에서 득점하며 A매치 통산 57골을 기록했다. 한국 축구 역대 A매치 최다 득점 기록에 한 골 차로 다가선 만큼 우루과이전에서 새로운 역사를 쓸지도 관심이다.
경기 시간이 다가오면서 경기장 주변의 붉은 물결은 점점 짙어졌다. 체험 행사를 즐기던 가족들은 입장 시간을 확인했고 친구들과 사진을 찍던 팬들은 응원도구를 챙겨 출입구로 향했다.
지난해 빈자리가 늘어가던 경기장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관 중석을 등졌던 팬들이 다시 경기장으로 향하기 시작했고 어린이들은 국가대표 선수의 이름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공을 찼다.
정 전 회장과 홍 전 감독이 물러났다고 해서 대한축구협회가 안고 있는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다. 북중미 월드컵에서 받은 충격과 대표팀을 향한 실망감 역시 한 번의 승리만으로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돌아선 팬심을 붙잡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라운드 위에서 달라진 경기력과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스타 선수들의 이름이나 일회성 행사만으로는 지속적인 관심을 만들기 어렵다는 사실을 한국 축구는 이미 경험했다.
에콰도르전 완승으로 출발한 모레노호는 팬들에게 다시 경기장을 찾을 이유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