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서울월드컵경기장=오승혁 기자] "국가대표는 경험하는 자리가 아니라, 증명하는 자리다."
14일 저녁 8시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위치한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한국과 파라과이 축구대표팀의 A매치 친선경기를 마치고 진행된 홍명보(56)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의 기자회견을 들으면서 계속 떠오른 말이다.
11년 전인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16강 진출에 실패한 한국 축구대표팀의 성적을 두고 방송사에서 해설을 맡았던 이영표(48)가 "월드컵에 경험을 쌓기 위해 오는 팀은 없다. 실력을 증명하는 자리"라고 쓴 소리를 했다.
당시에도 한국 축구대표팀을 이끌었던 이는 홍 감독이다. 그리고 그때의 장면이 지금 또 반복되는 분위기다. 홍 감독은 고장난 전축이 똑같은 구간만 반복 재생하는 것처럼 대부분의 인터뷰에서 "배웠다", "시뮬레이션을 했다", "극복했다" 등의 문구를 계속 돌려막기 하듯 사용하고 있다.
이쯤 되니 언제쯤이면 "훈련의 성과를 증명했다", "우리의 시도가 어떤 방향으로 이뤄졌다" 등의 새로운 내용을 다른 경기와 인터뷰에서 만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이날의 인터뷰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2-0이라는 스코어로 승리했지만, 나흘 전에 열렸던 브라질전이 6만3000명 이상의 관중을 모았던 것과 달리 2만 2000명 가량의 관중을 기록하며 흥행 참패한 상황의 언급으로 홍 감독은 인터뷰를 시작했다.
홍 감독은 "경기장에 빈 좌석이 보이긴 했지만, 팀이 어려운 상황에도 응원해주신 팬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손흥민(33·LAFC)이 10일 A매치 경기 최다 출전 기록을 달성해 리빙 레전드 차범근(72)에게 기념 유니폼을 선사 받는 행사가 있었음에도 경기장을 반도 채우지 못한 상황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하자 기자회견 장내가 약간 술렁일 정도였다.
이어 그는 "브라질전과 파라과이전을 통해서 시뮬레이션 했다. 월드컵 (본선) 1차전과 2차전 형태로 준비했다"며 이번 친선 경기가 월드컵에서 만날 강호들을 상대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시험해본 무대라고 말했다.
기자회견이 끝난 뒤 집으로 돌아가는 팬들의 생생한 반응이 듣고 싶어서 서울월드컵경기장을 크게 한 바퀴 돌았다. 적나라한 반응들이 곳곳에서 들렸다. 승리를 마냥 기뻐하는 반응은 찾기 어려웠다.
한 팬이 "파라과이가 골운이 없었을 뿐이지, 그들 공격이 제대로 다 성공했으면 (한국은) 오늘도 크게 졌다. 우리가 두 골 넣은 게 진짜 운이 좋았다"고 말하자 함께 걷던 이들이 착잡한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어 주차장을 거닐던 한 커플의 여자친구가 "오빠, 이겼는데 영 이긴 것 같지 않아"라고 하자 "그러게, 괜히 왔나"하는 대화도 귀를 때렸다.
실제로 한국의 승리에는 다분히 행운이 따랐다. 전반 3분에는 센터백과 골키퍼의 호흡이 맞지 않아 실점 위기를 맞았으며 전반 43분에도 빌드업 실수로 파라과이에 일대일 찬스를 내줬다. 파라과이 공격수 로날도 마르티네스의 슛을 골키퍼 김승규가 동물적 감각으로 넘어지면서 막아내지 않았다면 그대로 골로 연결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후반 25분에는 디에고 곤살레스의 왼발 프리킥이 골대를 때린 뒤 안토니오 사나브리아의 헤더로 이어지는 아찔한 순간이 이어졌다. 두 차례의 슛 모두 골에 근접했다. 한국에는 행운이 계속됐고, 파라과이에는 골운이 따르지 않았다. 북중미 월드컵 본선까지는 이제 8개월 정도 남았다. 언제쯤 "우리는 이렇게 증명했다"는 홍명보 감독의 말을 들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