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박순규 기자] 정상에 오르는 것도 어렵지만, 정상을 지키는 것은 더 어렵다. 수많은 도전자가 쫓아오고, 상대는 끊임없이 약점을 분석한다. 자신이 세운 기록은 새로운 부담이 되고, 어제의 성공은 오늘의 승리를 보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스포츠 역사에서 진정한 위대함은 한 번의 우승보다 정상의 자리를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압도적으로 지켜내느냐에 달려 있다.
'배드민턴 여제' 안세영(24·삼성생명)이 바로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그것도 세계 배드민턴 역사상 누구도 밟지 못한 길을 개척하며 한국 팬들 앞에서 새로운 역사를 완성했다.
안세영은 8일 전남광주 여수 진남체육관에서 열린 2026 세계배드민턴연맹(BWF) 월드투어 코리아오픈 여자단식 결승에서 일본의 야마구치 아카네를 2-1(21-12 15-21 21-16)로 꺾었다. 이날 승리로 개인전 시즌 11번째 우승을 차지하며 남녀 단식을 통틀어 세계 최초의 '2년 연속 11관왕'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단일 시즌 11회 우승은 2019년 일본의 모모타 겐토가 달성했고, 안세영이 지난해 같은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두 시즌 연속으로 이 경지에 도달한 선수는 없었다. 한 해의 독주는 가능할지 몰라도 2년 연속 세계 최강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도전이기 때문이다.
안세영의 성적표는 경이롭다. 올 시즌 72전 71승 1패. 승률 98.61%다. 지난 3월 전영오픈 결승에서 중국의 왕즈이에게 패한 이후 무려 55경기를 연속으로 이겼다. 세계랭킹 2위 야마구치를 상대로는 11연승, 일본 선수 전체를 상대로는 24연승을 이어갔다.
하지만 숫자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숫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세계랭킹 1위에게 매 경기는 도전이 아니라 방어전이다. 상대 선수들은 안세영을 이기기 위해 전술을 연구하고, 공격 패턴을 분석하며, 체력과 집중력의 한계를 시험한다. 그럼에도 안세영은 무너지지 않는다. 상대가 강해지는 만큼 자신도 진화한다. 수비만 뛰어난 선수가 아니라 공격의 정확성과 속도까지 끌어올린 완성형 선수로 거듭났다.
이번 코리아오픈 결승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안세영은 첫 게임을 21-12로 압도했지만 두 번째 게임을 15-21로 내줬다. 세계 2위 야마구치의 반격은 거셌다. 그러나 승부처에서 다시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마지막 3게임에서 11-9로 앞선 뒤 5점을 연속으로 따내며 승기를 잡았다. 흔들릴 수는 있어도 끝내 무너지지 않는 정신력, 그것이 안세영의 진짜 경쟁력이다.
고사성어에 '승불교 패불뇌(勝不驕 敗不餒)'라는 말이 있다. 이겨도 교만하지 않고, 패해도 낙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안세영의 성장 과정에 잘 어울리는 표현이다.
지난해 코리아오픈 결승에서 야마구치에게 0-2로 패했을 때도 안세영은 패배를 성장의 자양분으로 삼았다. 그리고 1년 뒤 같은 대회 결승에서 같은 상대를 꺾었다. 승리보다 패배에서 더 많이 배우는 선수, 그래서 어제보다 오늘 더 강해지는 선수다.
더욱 의미 있는 것은 이 역사적인 순간이 한국 팬들 앞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안세영은 세계 곳곳에서 태극기를 올리고 애국가를 울려왔다. 하지만 올해 11번째 우승 트로피는 고국에서 들어 올렸다. 2022년과 2023년에 이어 통산 세 번째 코리아오픈 우승을 달성하며 한국 배드민턴의 전설 방수현이 1996년 완성했던 대회 여자단식 통산 3회 우승 기록과도 30년 만에 어깨를 나란히 했다.
방수현에서 안세영으로 이어지는 한국 여자 배드민턴의 역사는 세대를 넘어 세계 정상에 도전하는 한국 스포츠의 저력을 보여준다. 방수현이 길을 열었다면 안세영은 그 길을 더 넓고 높은 곳으로 확장하고 있다. 그 성취를 한국 팬들이 눈앞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여수의 우승은 특별하다.
그러나 우리가 안세영의 기록에서 읽어야 할 것은 개인의 천재성만이 아니다.
스포츠에서 한 명의 위대한 선수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재능과 노력은 물론 훈련 환경, 체계적인 관리, 지도자의 전문성, 안정적인 지원이 뒷받침돼야 한다. 특히 세계 최정상급 선수에게는 충분한 회복과 부상 예방, 과학적인 체력 관리가 필수적이다.
한국 스포츠가 진정으로 고민해야 할 과제는 안세영의 우승을 얼마나 크게 축하하느냐가 아니라, 안세영과 같은 선수가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있다. 선수를 기록 생산의 수단으로만 바라본다면 오늘의 영광은 내일의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기록을 세운 선수보다 그 기록을 가능하게 한 노력과 과정을 존중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안세영의 도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음 달 중국 항저우에서 열리는 BWF 월드투어 파이널스에서 우승하면 개인전 시즌 12관왕이라는 또 하나의 세계기록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설령 12번째 우승에 실패하더라도 이미 이룩한 업적의 가치는 달라지지 않는다.
스포츠의 위대함은 패배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패배를 딛고 더 강해지는 데 있기 때문이다.
55연승, 72전 71승 1패, 승률 98.61%, 2년 연속 11관왕. 어쩌면 우리는 지금 한국 스포츠 역사에서 다시 보기 어려울 전성기를 목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안세영은 이제 경쟁자와 싸우는 선수를 넘어 자신의 한계와 싸우는 선수가 됐다. 그리고 그 싸움은 아직 진행 중이다. 한국 팬들 앞에서 완성된 세계 최초의 기록은 정상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위대함의 시작일 수 있다.
'안세영 천하'가 특별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