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박호윤 전문기자] 골프는 누구도 결말을 미리 알 수 없는 스포츠다. 140명이 넘는 선수가 나흘 동안 경쟁하는 스트로크 플레이에서 우승자를 미리 점치는 것은 사실 무모한 일이다. 전 주 대회 우승자도 컷오프를 당할 수 있고, 세계랭킹 1위나 가장 좋은 흐름을 타는 선수 역시 마지막 퍼트를 넣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AIG여자오픈 만큼은 개막도 하기 전에 역사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대회가 됐다.
#메이저 2승 vs 2승, 75년 역사가 만든 가장 절묘한 균형
2026년 LPGA 투어 메이저 대회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풍경을 만들어냈다. 시즌 마지막이자 5번째 메이저 대회를 앞두고 절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세계 랭킹 1위 넬리 코다(미국)가 셰브론챔피언십과 US여자오픈을 제패하자, 한국의 유해란(25)이 KPMG위민스PGA챔피언십과 아문디 에비앙챔피언십을 연속 품으며 맞불을 놨다. 이미 치러진 네 차례 메이저를 두 선수가 정확히 두 개씩 나눠 가진 것이다.
이런 시즌은 70년이 넘는 LPGA투어 역사에 단 한 번도 없었다. 4대 메이저 체제가 시작된 1983년 이후는 물론, 에비앙 챔피언십이 메이저로 승격해 5개 체제가 된 2013년 이후에도 같은 시즌에 두 명의 선수가 메이저를 두 차례씩 나눠 가진 사례는 찾아 볼 수 없다. 그 이전에는 메이저 대회 수 자체가 적었기에 애초에 가능한 시나리오가 아니었다. 코다와 유해란이 그 누구도 밟지 못했던 영역에 처음 발을 디딤으로써 2026년은 이미 LPGA 역사에 새로운 한 페이지를 남기게 됐다.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이제부터다.
오는 30일 밤(한국시간) 잉글랜드 랭카셔의 로열 리덤 앤 세인트앤스GC에서 시작되는 시즌 마지막 메이저 AIG 여자오픈(총상금 1천만달러)에는 세 개의 역사가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다. (이 대회는 1976년에 유러피언여자투어(LET)로 창설돼 올해로 50주년이며, 1994년 LPGA투어 공동 개최, 2001년 메이저 승격 등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역사는 누구의 이름을 선택할까...각본없는 메이저 최종전
첫 번째는 넬리 코다가 노리고 있는 역사다.
코다가 우승하면 2013년 박인비 이후 13년 만에 한 시즌 메이저 3승을 달성한다. 동시에 아직 손에 넣지 못한 마지막 메이저를 채우며 역대 8번째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완성한다. 아울러 도쿄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기도 한 그는 박인비가 유일하게 보유하고 있는 '골든 커리어 그랜드슬램'(올림픽 금+커리어 그랜드슬램)이라는 금자탑까지 세우게 된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올해 대회가 열리는 로열 리덤 앤 세인트 앤스GC는 지난 2003년 '골프 여제' 아니카 소렌스탐이 위타빅스 브리티시여자오픈 우승으로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완성했던 바로 그 무대다. 23년 전 세계랭킹 1위가 자신의 시대를 완성했던 바로 그 코스에서, 또 다른 세계랭킹 1위 코다가 같은 기록에 도전하는 것이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지만 때로는 놀라울 만큼 닮은 장면을 다시 우리 앞에 펼쳐 놓기도 한다.
두 번째는 유해란의 역사다.
유해란이 우승하면 KPMG 여자 PGA 챔피언십과 에비앙 챔피언십에 이어 메이저 3연승을 달성한다. 이 역시 박인비가 2013년 시즌 초반부터 3개의 메이저를 연속 제패한 이후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기록이다.
여기에 한국 여자골프 역사도 함께 움직인다. AIG 여자오픈은 한국 선수들에게 특별한 무대였다.
이 대회가 메이저로 승격된 첫 해(2001년) 박세리가 그 첫번째 주인공이 된 이후 장정, 신지애(2회), 박인비, 김인경까지 모두 5명의 선수가 6차례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박세리가 문을 열었고, 장정이 2005년 첫 LPGA 우승을 메이저에서 신고했으며, 신지애는 두 차례 정상(2008, 2012년)에 올라 이 대회 최고의 한국 선수로 이름을 남겼다. 박인비는 이 대회에서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완성(2015년)했고, 김인경은 오랜 기다림 끝에 자신의 생애 첫 메이저 우승(2017년)의 감격을 누린 바 있다. 유해란이 우승한다면 이 계보를 잇는 여섯 번째 한국 선수이자 한국 선수 통산 일곱 번째 AIG 여자오픈 우승자가 된다.
#한국의 22번째 메이저 챔피언 탄생하나, 39승째 주인공은?
한국 여자골프 전체 메이저 역사에서도 의미는 작지 않다. 지금까지 한국은 모두 21명의 메이저 챔피언을 배출했고, 통산 38승을 합작했다. 박인비가 7승, 박세리가 5승, 전인지가 3승을 기록했고, 신지애와 박성현, 유소연, 고진영, 유해란이 각각 2승씩을 보태고 있다. 유해란이 이번 대회에서 정상에 오르면 개인 통산 메이저 3승으로 전인지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다. 한국 선수 통산 메이저 우승도 39승으로 늘어난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결말이 있다.
코다도, 유해란도 아닌 또 다른 챔피언의 탄생이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현실적인 시나리오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메이저 우슫은 어려운 일이다. 골프는 상대 한 명만 이기면 끝나는 스포츠가 아니다. 세계 최고의 선수 140여 명의 경쟁자를 모두 넘어야 한다. 코다와 유해란의 우승 가능성을 합쳐도 나머지 선수 가운데 누군가가 정상에 설 확률이 더 높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번 대회의 역사적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른 선수가 우승하더라도 2026년은 여자골프 역사상 처음으로 두 명의 선수가 메이저를 두 개씩 나눠 가진 시즌으로 남는다. 반대로 코다가 우승하면 또 하나의 커리어 그랜드슬램이, 그것도 아니카 소렌스탐 처럼 로열 리덤 앤 세인트 앤스에서 완성된다. 유해란이 우승하면 박인비 이후 13년 만의 메이저 3연승과 함께 한국 여자골프의 새로운 역사가 쓰인다.
결국 이번 AIG여자오픈은 시즌 마지막 메이저 우승자를 가리는 대회이면서 동시에 역사가 누구의 이름을 선택할 지를 지켜보는 무대다.
이런 승부는 정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