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박호윤 전문기자] ‘박인비를 넘어라!’
25일 밤(한국시간) 미국 미네소타주 차스카의 헤이즐틴 내셔널골프클럽에서 시작되는 KPMG위민스PGA챔피언십(이하 KPMG챔피언십)은 올시즌 세번째 메이저대회다. US여자오픈 보다 5년 늦은 1955년에 시작돼 올해로 72회째 개최되며 총상금은 1,300만달러로 올해 US여자오픈의 1,250만달러를 능가, 역사상 최고를 기록하게 된 권위있는 대회다.
그런데 이 같은 상징성 높은 메이저 대회의 올해 화두는 의외로 필드 밖의 박인비(38)다.
물론 박인비는 이번 대회에 출전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회가 시작되기도 전, 박인비의 이름이 거론된다. 이 대회를 통해 세계랭킹 1위 넬리 코다(미국)가 13년만에 단일 시즌 메이저 트레블(3관왕)에 도전하고, 리디아 고(뉴질랜드)가 역사상 두 번째 ‘골든 커리어 그랜드슬램’에 도전장을 던졌기 때문이다.
당연히 둘은 동시 달성이 불가능한 평행선이다. 하지만 이들의 ‘역사적 도전’이 모두 박인비의 이름과 연결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코다는 2013년의 박인비에, 리디아 고는 2016년의 박인비에 도전하는 형국이다. 현 세계 여자골프를 대표하는 두 슈퍼스타가 향하고 있는 목표가 모두 박인비가 남긴 역사적 이정표인 셈이다.
#코다, ‘2013년의 박인비를 넘어라’-단일 시즌 메이저 3승
코다는 올들어 무려 4승을 올리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고공비행을 거듭하고 있는데, 이 중 셰브론챔피언십과 US여자오픈을 잇달아 우승, 이미 ‘메이저 더블’을 달성했다. 따라서 이번 KPMG챔피언십마저 석권한다면 시즌 세 번째 메이저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게 된다.
이 기록의 의미는 생각보다 훨씬 크다. 현대 여자골프가 4대 메이저 체제를 확립한 1983년 이후, 단일 시즌 메이저 3승의 위업을 이룬 선수는 단 2명 뿐이다. 1986년 팻 브래들리와 2013년 박인비다. 브래들리는 나비스코 다이나쇼어(현 셰브론챔피언십)와 LPGA챔피언십(현 KPMG챔피언십)을 잇달아 석권한 뒤, US여자오픈에서는 5위에 그쳤으나 이어진 두 모리에 클래식마저 석권, 사상 최초의 단일 시즌 메이저 3관왕의 위업을 이룬 바 있다.
27년 뒤 박인비의 궤적은 더욱 강렬했다. 박인비는 시즌 첫 메이저인 크래프트 나비스코챔피언십(현 셰브론)을 시작으로 웨그먼스LPGA챔피언십(현 KPMG)과 US여자오픈을 차례로 석권, 남녀를 통틀어 첫 ‘캘린더 그랜드슬램’의 기대치를 높인 바 있다. 비록 시즌 마지막 메이저인 브리티시여자오픈에서 대기록 달성에 실패했지만, 현대 여자골프 역사상 최초로 시즌 첫 3개의 메이저대회를 모두 우승한 불멸의 기록을 남겼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에 걸쳐 투어를 지배했던 캐리 웹(호주)과 아니카 소렌스탐(스웨덴)도 메이저 2승(더블)까지는 도달했지만 끝내 시즌 메이저 3승의 벽을 넘지는 못했다. 박인비 외엔 그 누구도 넘볼 수 없었던 영역에 코다가 도전하는 것이다.
만약 코다가 이번 KPMG챔피언십에서 우승한다면 13년만에 박인비의 트레블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위업을 달성함과 동시에 이전에는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전인미답의 고지, 즉 캘린더 그랜드슬램에 단 한 걸음만 남겨 놓게 된다.
#리디아, ‘2016년의 박인비를 넘어라’-골든 커리어 그랜드슬램
천재 소녀에서 명예의 전당 멤버로 거듭난 리디아 역시 ‘박인비의 공간’에 합류하고자 한다. 리디아에게 이번 대회는 커리어를 완벽하게 완성할 최후의 퍼즐 조각이다. 리디아는 이미 셰브론챔피언십과 에비앙챔피언십, 그리고 AIG위민스오픈 우승 트로피를 보유하고 있다. 이번에 KPMG챔피언십 마저 정복한다면 염원하던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게 된다.
하지만 진짜 전율이 돋는 대목은 그 다음이다. 올림픽 금, 은, 동메달을 한차례씩 모두 목에 건 리디아가 4대 메이저 우승컵에 올림픽 금메달을 얹는 순간, 세계 골프사에서 오직 박인비만이 유일하게 허락받았던 ‘골든 커리어그랜드슬램’의 영예를 나눠 쥐게 된다. 박인비는 2015년 리코 위민스브리티시오픈 우승으로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완성한 뒤 이듬해 리우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 남녀를 통틀어 현존 유일의 ‘골든 커리어 그랜드슬래머’다.
#한국과 KPMG챔피언십의 특별한 인연
한국 여자골프와 이 대회의 인연도 각별하다. US여자오픈이 박세리의 1998년 우승을 포함해 11회로 한국 선수들이 가장 많이 우승한 메이저라면, KPMG챔피언십 역시 그 못지 않게 특별한 무대다. 박세리(1998, 2002, 2006년)와 박인비(2013~2015년)가 세 차례씩 정상에 올랐고 김세영, 박성현, 전인지, 양희영도 각각 트로피를 들어 올려 모두 10회나 한국 선수가 우승한 대회다. 더욱이 2024년 양희영의 이 대회 우승이 한국의 가장 최근 메이저 우승 기록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번 대회는 코다와 리디아의 ‘역사적 도전’ 뿐 아니라 한국 여자골프가 다시 한 번 이 대회와의 깊은 인연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인지도 관심사다.
#남자 메이저 코스를 순회하는 격조 높은 무대
이번 대회의 또 한가지 특별한 의미는 개최 장소에도 있다. 이 대회는 과거 맥도널드LPGA챔피언십, 웨그먼스LPGA챔피언십 시절에는 특정 골프장에서 장기간 열려 왔다. 그러나 2015년 KPMG와 미국프로골프협회(PGA of America)가 손을 잡으면서 완전히 탈바꿈했다.
이번 대회가 열리는 헤이즐틴은 라이더컵과 PGA챔피언십을 개최했던 미국의 대표적인 메이저 무대다. 또한 이전에 열렸던 발투스롤GC, 컨그레셔널CC, 애틀랜타 애슬레틱클럽 등도 남자 메이저대회가 열리는 미국 최고의 명문 코스들이다. 마치 US오픈이나 디 오픈 처럼 미국내 초일류 명문 코스를 순회하는 메이저로 진화한 것이다.
결국 이번 주 헤이즐틴에서는 여자골프의 현재를 대표하는 두 선수가 박인비의 ‘위대한 유산’에 도전한다. 한 명은 13년만의 메이저 트레블을 꿈꾸고, 또 한 명은 역사상 두번째 골든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노린다.
넬리 코다는 '2013년의 박인비'를 향해, 리디아 고는 '2016년의 박인비'를 향해 걷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