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보르길리’의 눈물, 그 끝엔 더 뜨거운 질주가 기다린다 [박순규의 창]


16일 밀라노의 빙판 적신 김길리의 눈물… 불운 털어낸 값진 동메달
이제 남은 두 번의 기회에서 ‘진짜 승부’ 보여주길

한국 쇼트트랙의 김길리가 16일(현지 시간) 이탈리아 밀라노 아이스 스케이팅 아레나에서 열린 2026 밀라노·코르티나 담페초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1000m에서 동메달을 차지한 뒤 복합적인 감정을 억누르며 태극기를 들고 경기장을 돌고 있다./밀라노=뉴시스

[더팩트 | 박순규 기자] 16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밀라노 아이스스케이팅 아레나.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1000m 시상식에서 동메달을 목에 건 김길리(21·성남시청)는 애써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결승선을 통과한 후 눈물을 흘리던 복합적인 감정을 비로소 추스린 듯했다. 그러나 시상식 미소 뒤에는 감당하기 힘든 상처와 압박감, 그리고 메달 획득의 안도감이 숨겨져 있었음이 금세 드러났다.

진짜 감정은 시상대가 아닌 무대 뒤, 방송사 인터뷰 구역(믹스트존)에서 터져 나왔다. 취재진의 마이크 앞에 선 김길리는 첫마디를 떼기도 전에 다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때문에 인터뷰를 이어갈 수 없었고, 결국 생방송이 중단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국민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 그 오열은 단순한 감격과 아쉬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번 대회에서만 무려 세 번이나 빙판에 넘어져야 했던 가혹한 불운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올림픽에서 주위의 기대에 부응해야했던 처절한 사투의 흔적이었다.

되돌아보면 이번 올림픽, 김길리의 레이스는 ‘상처투성이’였다. 앞선 혼성 2000m 계주 준결선에서 미국 선수와 충돌해 메달의 꿈을 접어야 했고, 이날 여자 1000m 준결선에서도 벨기에 하너 데스머트의 반칙에 휘말려 펜스에 부딪혔다. 1000m 예선에서 결승선 통과 후 충돌까지 포함하면, 이번 대회에서만 벌써 세 번째 넘어짐이었다.

올림픽이라는 큰 무대에서 한 번도 겪기 힘든 넘어짐을 세 번이나 겪었다. 몸도 마음도 성할 리 없다. 보통의 선수라면 트라우마로 인해 스케이트 날을 내딛는 것조차 두려웠을 상황이다. 하지만 김길리는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났다. 어드밴스로 구사일생하여 오른 1000m 결선 무대, 그는 자신이 왜 ‘람보르길리’로 불리는지 증명했다.

세계 최강 잔드라 펠제부르(네덜란드)와 코트니 사로(캐나다) 사이에서 기죽지 않고 인코스를 파고들며 선두 다툼을 벌였다. 세 번이나 넘어진 선수가 보여줄 수 있는 레이스가 아니었다. 비록 막판 스피드 경쟁에서 밀려 동메달에 만족해야 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얻어낸 결과였기에 인터뷰에서의 그 눈물은 더욱 뜨겁고 값졌다.

첫 올림픽 출전에서 동메달을 목에 건 람보르길리 김길리 프로필./뉴시스

방송이 중단될 만큼 쏟아낸 눈물은 역설적으로 김길리의 불운이 이제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볼 수 있다. 최민정(성남시청)과 함께 한국 여자 쇼트트랙을 지탱해야 한다는 중압감, 그리고 지독하게 따라붙던 불운들은 그 눈물과 함께 씻겨 내려갔다. 우여곡절을 딛고 기어이 시상대에 오른 김길리의 동메달은 한국의 쇼트트랙 여자부 첫 메달이자 한국 선수단의 6번째 메달이었다.

이제 김길리의 올림픽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가장 큰 부담을 털어낸 지금부터가 진짜 승부처다. 그에게는 메달 색깔을 바꿀 수 있는, 아니 ‘람보르길리’의 폭발적인 질주를 제대로 보여줄 두 번의 기회가 남아 있다.

첫 번째 기회는 여자 3000m 계주다. 김길리는 동료들과 함께 결선에 안착해 있다. 넘어지고 부딪히며 단단해진 김길리의 투혼은 팀 전체를 깨우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이어지는 여자 1500m는 김길리의 주 종목이자, 한국 쇼트트랙 중장거리의 자존심이 걸린 무대다. 최민정, 노도희와 함께 나서는 이 종목에서 김길리는 그동안 비축해둔 체력과 한을 모두 쏟아부을 태세다.

인터뷰에서 쏟아낸 김길리의 눈물은 패배의 상처가 아닌, 더 높이 날아오르기 위한 비상(飛上)의 눈물이었다. 눈물은 말랐고, 심장은 다시 뛴다. 세 번 넘어져도 네 번 일어나는 ‘람보르길리’가 남은 두 번의 레이스에서 보여줄 거침없는 질주를 기대한다. 김길리의 진짜 올림픽은, 눈물을 닦은 바로 지금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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