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노동판서 캔 기적', 김상겸 '눈물의 銀'...400번째 메달의 무게 [박순규의 창]

스노보드 은메달리스트 김상겸이 8일 이탈리아 리비뇨 스노파크에서 열린 2026 밀라노코르티나 담페초 동계올림픽 스노보드 남자 평행대회전 메달 시상식에서 은메달을 입에 물며 감격적인 순간을 보내고 있다./리비뇨=뉴시스

[더팩트 | 박순규 기자] 0.19초. 눈 깜짝할 새 지나가는 이 찰나의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평생을 바친 꿈의 간격이었고, 대한민국 스포츠 역사에는 영원히 기록될 이정표가 되었다. 8일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스노보드 남자 평행대회전 결승, 김상겸(37·하이원)이 결승선을 통과하며 대한민국 선수단에 첫 메달을 안겼다.

이 은메달은 단순한 2등의 기록이 아니다. 대한민국 동·하계 올림픽 통산 400번째 메달이라는 기념비적인 숫자이자, 서른일곱 살 노장 선수가 막노동판의 흙먼지와 비인기 종목의 설움을 딛고 쏘아 올린 ‘인간 승리’의 드라마였다.

사실 이번 대회의 스포트라이트는 그에게 있지 않았다. 대중의 시선은 ‘배추 보이’ 이상호에게 쏠려 있었다. 그러나 이상호가 16강에서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며 메달 전선에 먹구름이 드리운 순간,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맏형’ 김상겸이 비상했다. 예선 18위의 위기를 뚫고 올라온 그는 16강, 8강, 4강을 거치며 세계적인 강호들을 연파했고, 결승에서는 ‘스노보드 황제’ 벤야민 카를(오스트리아)과 대등한 승부를 펼쳤다. 비록 0.19초 차로 금메달은 놓쳤지만, 그가 보여준 레이스는 금빛보다 찬란했다.

우리가 김상겸의 은메달에 더욱 뜨겁게 반응하는 이유는 그 화려한 결과 뒤에 감춰진 처절했던 과정 때문이다. 유년 시절 천식을 앓던 약골 소년이 스노보드 국가대표가 되기까지의 여정도 험난했지만, 성인이 된 후 마주한 현실은 더욱 냉혹했다. 실업팀 하나 없는 비인기 종목 선수의 삶은 생존 그 자체였다. 그는 훈련비를 벌기 위해 시즌이 끝나면 공사판을 전전해야 했고, 훈련 중인 주말에도 아르바이트를 뛰며 꿈을 이어갔다.

그러나 김상겸은 환경을 탓하며 주저앉는 대신, 스스로를 깎아내며 단단해지기를 택했다. 서른이 넘은 나이, 에이징 커브를 걱정할 시기에 그는 오히려 전성기를 열어젖혔다. 한때 소주 4병을 마시던 애주가였던 그는 술을 완전히 끊었고, 하루 10시간 수면과 철저한 비디오 분석이라는 수도승 같은 루틴을 지켰다. 37세라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대기만성’은 준비된 자에게 반드시 찾아온다는 것을 그는 온몸으로 증명해 냈다.

포기하지 않는 김상겸의 메달 사냥은 네 번째 올림픽 출전 끝에 이뤄졌다. 2014년 소치 올림픽에서 17위, 2018년 평창 올림픽에선 15위, 2022년 베이징 올림픽에선 24위를 기록하는 데 그쳤지만 2026년 밀라노·코르티나에서 마침내 시상대에 섰다. 그의 은메달은 이번 대회 한국 선수단의 첫 메달이자, 한국 올림픽 역사상 동·하계를 통틀어 400번째 메달이기도 해서 가치를 더했다. 한국은 그동안 하계올림픽에서 320개(금109·은100·동111)를, 동계올림픽에서 79개(금33·은30·동16)의 메달을 따냈다. 한국 스노보드의 메달은 2018년 평창 올림픽 이상호의 은메달 이후 8년 만이다.

시상대 위에서 김상겸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려 포효했다. 하지만 "함께 고생한 아내가 생각난다"는 말과 함께 끝내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그 눈물은 지난 4번의 올림픽 도전 동안 삼켜왔던 설움이자, 묵묵히 자신을 믿어준 가족에 대한 감사였을 것이다. 또한, 경쟁자이자 동료인 이상호가 한국 스노보드의 길을 열어준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며 공을 돌리는 겸손함은 진정한 ‘맏형’의 품격을 보여주었다.

김상겸의 은메달은 우리에게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 화려한 조명이 비치지 않는 곳에서도, 남들이 늦었다고 말하는 나이에도, 포기하지 않고 땀 흘린 자에게 기적은 반드시 응답한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 올림픽 역사상 400번째 메달의 주인공이 된 김상겸. 그는 이제 더 이상 생계를 걱정하던 막노동판의 청년이 아니다. 그는 설원 위를 지배하는 진정한 승부사이며, 우리 시대의 희망을 증명한 영웅이다. 그의 스노보드 인생은 이제 막 진짜 하이라이트를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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