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는 '셰플러 시대'...조용한 가운데 이미 시작됐다 [박호윤의 IN&OUT]


따라하려 하지 않는데, 모두가 닮아간다
우즈 시대 이후, 새로운 선택의 기준
기록보다 영향력...셰플러가 만든 골프의 변화

스코티 셰플러가 지난해 페덱스컵 플레이오프 2차전 BMW챔피언십에서 우승한 뒤 트로피를 들고 기뻐하는 모습. 이 대회는 우승컵과 함께 미웨스턴골프협회의 JD웨들리 트로피를 하나 더 수여한다./AP.뉴시스

[더팩트 | 박호윤 전문기자] 스코티 셰플러(30·미국)가 변함없는 세계랭킹 1위로 새해를 맞았다. 2023년 5월 1일 OWGR(세계골프랭킹) 최정점에 오른 그는 2년 8개월이 넘도록 단 한 차례도 자리를 내주지 않았고, 앞으로도 상당 기간 추월을 허용하지 않을 분위기다.

현재 평균 포인트는 16.66점. 사실상 유일한 추격자인 로리 맥길로이 조차 9.27점으로 셰플러의 55% 수준에 머물러 있다. 세계랭킹 3·4위인 토미 플리트우드(5.53점)와 잰더 쇼플리(5.29점)는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셰플러는 지난해 말 PGA투어 최고의 선수에게 수여되는 잭 니클러스 어워드(올해의 선수상)를 4년 연속 수상했다. 이 상을 11차례 받은 타이거 우즈를 제외하면, 3회 수상의 맥길로이를 넘어 역대 두 번째로 많은 기록이다.

지난 시즌 셰플러는 메이저 2승(PGA 챔피언십, 디 오픈)을 포함해 6승을 거두며 압도적인 지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사실 이런 성과는 특별히 ‘이례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2024시즌에도 그는 7승(메이저 1승)에 파리올림픽 금메달까지 수확한 바 있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셰플러가 더욱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성적 그 자체보다, 4시즌 만에 19승을 쌓아 올린 승수와 시즌 및 통산 상금, 평균 타수 등은 물론 타이거 우즈가 2006, 2007년 8승, 7승을 기록한 이후 18년 만에 ‘2시즌 연속 6승 이상’ 기록을 재현했다는 점에 있다. 이제 거의 모든 지표에서 그는 스스로 ‘우즈급 반열’에 올랐음을 증명하고 있다.

맥길로이 역시 2025시즌 마스터스 우승으로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완성하며 전설의 반열에 올랐고 PGA투어 3승, DP월드투어 4연패 및 통산 7번째 정상, 라이더컵 원정 승리 등 자신으로선 역대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셰플러와의 격차는 여전히 분명하다.

셰플러(왼쪽)가 2024년 히어로 월드챌린지에서 우승한 뒤 호스트인 타이거 우즈와 우승컵을 가운데 두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AP.뉴시스

물론 셰플러와 타이거 우즈를 직접 비교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통산 82승, 세계랭킹 1위 보유 기간 683주라는 기록은 여전히 넘을 수 없는 벽이다. 셰플러 스스로도 "나는 이제 4분의 1쯤 왔을 뿐"이라며 "우즈는 골프 역사에서 독보적인 존재"라고 존경을 표한다.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은, 누가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셰플러의 시대’는 이미 시작됐다는 점이다.

PGA투어 공식 홈페이지에 정기적으로 기사를 기고하는 폴 호도워닉 기자는 지난해 말 "셰플러의 2025년이 기억돼야 하는 이유는 그가 ‘프로골프의 한 시대를 규정하기 시작한 해’이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셰플러의 지배력을 보여주는 가장 큰 증거로 ‘그가 무엇을 하느냐’보다 그로 인해 '선수들이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를 들었다.

맥길로이는 지난해 1월 페블비치 프로암에서 가장 기상이 나빴던 3라운드를 보기 없이 65타를 친 뒤 "실수를 최소화하고 똑똑한 골프를 하려고 했다. 스코티 셰플러처럼!"이라고 말했다. WM 피닉스 오픈에 출전했던 아마추어 루크 클랜턴은 "골프가 내 정체성은 아니다. 그건 셰플러에게서 배웠다"고 했고, BMW 챔피언십에서 셰플러의 시즌 5승을 지켜본 악샤이 바티아는 "셰플러를 보면 골프와 삶의 균형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고 전했다.

셰플러는 골프에 올인하기 보다는 삶과의 균형을 중요시 하고 있는 선수다. BMW챔피언십 우승 후 가족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있는 모습./AP.뉴시스

이는 셰플러가 우즈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골프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즈가 골프를 ‘지배한 선수’였다면, 셰플러는 골프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존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타이거 우즈의 시대’의 골프는 분명했다. '더 멀리, 더 강하게, 더 정교하게.' 우즈는 기술과 피지컬, 승부욕의 기준을 끌어올렸고 후배들은 그를 모방하며 성장했다. 반면 셰플러는 다르다. 누구도 그의 스윙이나 루틴을 그대로 따라 하지 않는다. 대신 "셰플러처럼 실수를 줄이고 싶다", "셰플러처럼 균형을 유지하고 싶다"고 말한다. 우즈가 ‘정답이 되는 표본’이었다면, 셰플러는 ‘각자가 해석해야 할 기준’이다.

셰플러의 가장 큰 강점은 압도적인 샷 메이킹이 아니라 판단의 안정성이다. 그는 언제나 가장 위험이 적은 선택을 한다. 공격과 후퇴의 경계를 명확히 알고 있다. 맥길로이가 "셰플러 처럼 플레이 하려 했다"고 한 것은 스윙이나 비거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수를 관리하는 방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현대 골프에서 기술 격차는 거의 사라졌다. 비거리는 상향 평준화됐고, 아이언 정확도 역시 큰 격차를 만들기 어렵다. 결국 승부를 가르는 것은 상황 판단이며, 셰플러는 이 시대의 요구에 가장 정확히 부합하는 선수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그의 영향력이 코스 밖에서도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22년 마스터스 우승 후 "나의 정체성은 골프 점수가 아니다"라고 말한 셰플러의 철학은 이제 선수들 사이에 빠르게 스며들고 있다. 타이거 우즈가 "골프에 모든 것을 걸어라"는 시대를 만들었다면, 셰플러는 "골프는 잘하되, 전부는 아니다"라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요란하지 않고 공식적인 대관식도 없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투어는 그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렇게 조용한 가운데, ‘셰플러의 시대’는 이미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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