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제비 탈북자 출신' 패럴림픽 국대 최광혁 "이제 하키가 나의 전부"

2018 평창 동계패럴림픽 아이스슬레지하키 국가대표 최광혁(사진)의 굴곡진 인생사가 주목 받고 있다. /아름다운동행 페이스북

'꽃제비 출신 국대' 최광혁 "나는 국가대표"

[더팩트ㅣ박대웅 기자] "죽어도, 살아도, 그만이라 생각했다."

2018 평창 동계패럴림픽에서 당당히 '태극마크'를 가슴에 새긴 채 빙판을 누비는 장애인 아이스하키 선수 최광혁(31·강원도청)은 한때 유명한 '꽃제비'(집 없이 유랑하며 구걸하는 아이)였다. 그는 북한에서 제비가 따뜻한 안식처와 먹이를 찾아 헤매듯 먹고 쉴 곳을 찾아 유랑했다. 그러다 발목을 잃었다. 그리고 목숨을 걸고 "아빠를 만나게 해주겠다"는 브로커의 말만 믿고 북녘땅을 떠났다.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최광혁은 따뜻한 남녘에서 드디어 세상 밖으로 나왔다. '꽃제비 최광혁'은 대한민국 아이스슬레지하키 국가대표 최광혁으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1987년 함경북도 화성에서 태어난 최광혁은 찢어질 것 같은 가난과 가정불화로 가족과 함께 할 수 없었다. 9살 때부터 혈혈단신으로 구걸을 시작했다. 그러다 아이스크림 장사를 시작했다. 기차가 역에 정차하면 그 틈에 객실을 돌아 아이스크림을 팔았다. 꽤 쏠쏠했다. 열심히 일해 어머니도 찾고, 아버지도 찾고, 동생도 찾을 거라 믿었다.

꿈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내릴 타이밍을 놓쳤던 그는 달리는 기차에서 그대로 뛰어내렸다. 결국 마취 없이 발목을 잘라내야만 했다. 장사는 커녕 구걸도 어려웠다. 생계는 물론 인생 자체가 무너지는 긴 암흑에 빠졌다. 최광혁은 당시를 회상하며 "죽어도 그만, 살아도 그만"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돈도, 가족도, 발목도 잃은 최광혁에게 더 이상 희망은 없어 보였다.

"남쪽에서 아빠가 너를 기다린다." 반전은 탈북 브로커의 말에서 시작됐다. 일부 브로커가 아이들을 데려다 장기를 떼 판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지만 최광혁은 브로커의 손을 잡았다. "그래도 따라갔다. '살아도 그만, 죽어도 그만'인 나날이었다." 최광혁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우려와 달리 브로커는 차근차근 남한행을 준비했다. 최광혁은 "'정말 아빠가 날 찾고 있나'하는 희망이 생겼다가도 곧 '그럴 릴가 없다'고 단념하기를 반복했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2018 평창 동계패럴림픽 아이스슬레지하키 국가대표 최광혁이 빙판 위에서 스케이팅을 하고 있다. /아름다운동행 페이스북

2001년 8월. 최광혁은 마침내 한국 땅을 밟았다. 그리고 정말 한국에 아버지가 있었다. 브로커는 '네가(최광혁) 북한에서 알아주는 꽃제비였던 통에 찾아내기 쉬웠다'고 말했다. 가족과 재회의 기쁨, 탈북의 안도감도 잠시였다. 한국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모든 것이 힘들었다. 최광혁은 "사람들이 나를 도깨비 쯤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다 이주 청소년 대안학교인 '여명학교'에 입학한 최광혁은 그곳에서 상처난 마음을 보듬기 시작했다. 시간은 약이었다. '발목이 없다'는 약점을 인정한 순간, 피해의식은 천천히 사라졌고, 세상을 향한 날개가 돋아났다. 여명학교를 거쳐 한국복지대학에 입학한 최광혁은 그곳 교직원의 권유로 썰매를 타고 하는 하키인 아이스슬레지하키를 처음 시작했다.

하키는 최광혁을 세상 밖으로 이끌었고, 곧 그의 전부가 됐다. 마침내 최광혁은 아이스슬레지하키 국가대표가 됐고, 후원하는 단체도 생겼다. 태극마크를 달고 인생 2막을 시작한 최광혁은 왼쪽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오른손에 하키채를 쥐었다. 빙판의 냉기를 녹이며 구슬땀을 흘렸다. 그리고 세상의 편견과 신체적 한계를 극복했다.

최광혁은 "여전히 나는 장애인이다. 하지만 국가 대표다. 신체적 한계, 따가운 시선, 필요이상의 관심은 늘 나를 따라다니겠지만, 그럴 때마다 다짐할 것이다"라면서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늘 그랬듯이 또 해내리라"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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