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최정식 선임기자] 감독들로부터 종종 '정신력'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승부에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하는데 좀 애매하다. 너무나 포괄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보통은 상대에 비해 체력과 기술 모두 열세이거나 체력이 완전히 바닥난 상태에서 경기를 앞두고 있거나 이긴 경우에 쓴다. 과학자들은 운동경기에서 경기력과 정신력의 상관관계를 밝히려고 연구해 왔다. 그 결과 인간에게는 넘을 수 없는 유전적 능력의 한계가 존재하지만 훈련을 통해 선천적인 능력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주장이 나와있다.
하지만 이는 엄밀히 말하면 뇌의 기능, 즉 정신과 관련된 육체의 영역이다. 스포츠에서는 육체적 고통을 이겨내는 것 이외의 정신력이 존재한다. 한국 축구 대표팀을 이끌었던 거스 히딩크 감독은 "정신력은 죽어라고 뛰어다는 것이 아니라 승리에 대한 자신감과 의지"라고 말한 적이 있다. 강한 상대를 만나면 정신력을 강조하곤 했던 한국 축구를 향해 '정신력이 약하다'며 한 말이다.
이처럼 정신력은 육체적 한계를 넘어선다는 차원에서의 막판 집중력, 히딩크 외에도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자신감과 의지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된다. 경기가 끝났을 때 승패의 원인을 분석하면서 말하는 '방심'과 '패배 의식' 역시 정신력과 관계가 있다. 당연히 방심은 연승팀에게서, 패배 의식은 연패팀에게서 나타난다.
28일 잠실학생체육관에서 홈팀 SK와 원정팀 KGC인삼공사의 프로농구 경기가 열렸다. SK는 6연패 중이었고 KGC는 원정 7연승을 달리고 있었다. 결과는 SK의 86-83 승리. 한때 16점 차로 뒤졌지만 경기를 뒤집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KGC 김승기 감독은 "SK의 이기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보다 컸던 것 같다"고 말했다. 선수들이 크게 앞서자 방심해서 무리한 공격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주득점원인 이정현이었다. 김 감독은 "(통산 3점슛)400개까지 3개가 남아서 그런지 쏘면 안 되는 상황에서도 막 던지더라"며 "자제시키지 못한 내 잘못이지만 선수도 경기에 져 봐야 반성을 하게될 것"이라고 했다.
SK 문경은 감독에게는 선수들의 패배 의식이 문제였다. 문 감독은 "상대가 공격하면 무조건 골이 될 것 같아 조바심을 내고, 우리가 공격할 때는 던지면 다 안 들어갈 것 같아 걱정을 하더라"며 "작전도 간단하게 하고 선수들에게도 단순하게 생각하라고 주문했다"고 밝혔다.
이날 23점을 넣은 변기훈은 "지는 경기만 하다 보니 지는데 익숙해졌다"고 했다. 20점을 올린 김선형도 "오늘도 마지막 순간에 버저비터를 맞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고 털어놨다.
패배 의식을 떨쳐버린다는 것은 자신감을 찾는다는 말이다. 이를 대표하는 것이 슈터 변기훈이다. 자신의 말처럼 패배가 거듭되다 보니 개인적으로도 슬럼프에 빠졌다. 그런 그를 문 감독은 '2군'으로 내려보내 D리그에서 뛰도록 했다. 변기훈은 SK 선수 가운데 출장시간이 3번째로 많다. 주전이라는 의미다. 주전 선수가 부상 등으로 공백이 길었을 때 경기 감각을 찾기 위해 D리그에서 뛰는 경우는 있다. 아프지도 않은데 부진 때문에 내려가는 경우는 드물다. 그 자신은 "내려가고 싶었지만 말을 못했는데 감독님이 결정해 주셔서 감사했다"고 말했지만 마음이 좋았을 리는 없다.
문경은 감독으로서는 일종의 충격 요법이었을텐데 효과가 있었다. D리그에서 2경기에 나섰는데 삼성과의 경기에서 무려 50점을 넣었다. 그리고 KGC와 경기에 맞춰 다시 올라왔다. 문 감독은 "50점을 넣었다고 부른 것은 아니다. 팀의 주축이라서 어차피 써야 할 선수였는데 D리그 경기 영상을 봤더니 표정에 자신감이 넘쳤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되찾은 계기는 '오기'다. 이 역시 정신력의 일부다. 벤치만 지키다 D리그로 떨어졌다. 그런데 팀이 삼성에게 19점이나 앞서다가 역전패했다. 그 다음날 2군이지만 삼성을 만났다. 50점을 넣으며 분풀이를 했다. 하지만 다시 1군에 올라와서도 확신은 없었다. 변기훈은 "나름대로 감을 잡았다고 생각했지만 될지 안 될지는 미지수였다. 돌파도 해보고 이것저것 시도해 봤는데 괜찮았다. 자신감이 생겼다"고 했다.
마음 속에서 패배 의식을 걷어낸다는 것은 쉽지 않다. 연패에 빠진 팀은 단체 삭발도 해보고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지만 '어떻게 해도 질 것 같은' 불안감을 좀처럼 떨쳐내지 못한다. 2014~2015시즌 초반 전자랜드는 9연패에 빠졌다. 유도훈 감독은 "많이 지다 보면 그것 때문에 또 진다"고 했다. 그가 연패에서 벗어나 연승을 달리며 팀을 정상으로 돌려놓은 뒤 사령탑 첫해였던 삼성 이상민 감독이 연패에 빠졌다. 후배에게 해줄 말이 없느냐는 말에 그의 대답은 "이길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였다.
히딩크는 이기겠다고 정신력을 내세우는 선수들에게 자신감과 의지가 부족하다고 했다. 정신력을 강조하는 것이 사실은 패배 의식의 또다른 모습임을 지적한 것이다. 어쩌면 선수들에게, 패배 의식을 걷어낸다는 것은 과정이 아니라 목표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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