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대표에서 농구 해설, 심판까지!
[더팩트ㅣ이성노 기자] 1990년대 한국 여자농구 아시안게임 2연패에 앞장섰던 천은숙(48). 곱상한 외모와 달리 그의 별명은 '천장군', '불사조'였다. 다부진 체력으로 쉴 새 없이 코트를 휘저으며 한국여자농구 전성기를 함께했다. 재능을 인정받아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청소년, 성인 대표팀에 차례로 합류했고, 1990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 1994 히로시마 아시아경기대회에서 2회 연속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1996 애틀랜타 올림픽까지 경험했다.
'농구 본고장' 미국에서도 예의주시하며 한국인 1호 WNBA 진출 이야기까지 나왔다. 하지만 그만큼 역경도 많았다. 선수 생활에 치명타를 안긴 아킬레스건 부상을 시작으로 팀 방출까지 경험했다. 하지만 천은숙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쓰러지면 다시 일어났고, 농구가 있는 곳이면 국외도 마다치 않았다. 선수 생활 이후엔 지도자와 심판까지 도전하며 계속해서 농구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천은숙은 지난달 27일 인터넷 방송 해피온TV '김장훈 제갈성렬의 샤우팅'에 출연해 파란만장한 농구 인생을 털어놨다. 그는 실업 농구 시절 두 번의 아시안 게임과 한번의 올림픽 무대까지 경험하며 전성기를 보냈으나 아킬레스건 수술 이후엔 시련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천장군', '불사조'라는 별명처럼 그는 포기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났다. <더팩트>와 가진 인터뷰에서 천은숙은 여전히 당당했다.
◆ 아시안게임 2연패, 1996 애틀랜타 올림픽 그리고 WNBA
언니를 따라 시작한 농구 인생. 처음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초등학교 6학년 때 10cm 이상 키가 자라면서 가드부터 센터까지 전 포지션을 소화하면서 농구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농구 명문' 동주여자상업고등학교시절에 청소년 대표에 뽑혔고, 1988년엔 실업팀 코오롱에 입단했다. 코트 구석구석을 찌르는 '송곳 패스'와 3점슛 능력에 강력한 체력을 앞세워 골 밑 돌파까지 능했던 그는 대표팀 발탁 1순위였다.
실업 3년 차였던 1990년엔 베이징 아시안게임에 출전해 '만리장성' 중국과 결승전에서 결정적인 바스켓 카운트 3점 플레이를 펼치며 77-70 승리의 발판을 마련했다. 4년 뒤 일본 히로시마에선 주축 멤버로 활약해 '홈팀' 일본과 결승에서 맹활약하며 77-76 극적인 역전승을 만들며 대회 2연패에 성공했다.
천은숙은 '김장훈 제갈성렬의 샤우팅'에서 당시 논란이 됐던 '져주기 논란'에 대해서 비화를 공개했다.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여자 농구는 한국, 일본, 중국, 대만, 카자흐스탄, 태국은 풀리그 치러 결승, 3~4위전을 치렀는데 한국은 예선에서 4연승을 질주하고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숙적' 일본과 마주했다. 한국은 졸전 끝에 80-84로 패했다. 결승 진출엔 이상이 없었으나 '중국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져줬다'라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한국은 5점차 이하로만 지면 일본과 결승을 치르고, 만약 이긴다면 중국과 2년 연속 만나게 되는 상황이었다.
천은숙은 "5점차 이상으로 지면 결승에 나갈수 없는 상황이었다. 절대 승부조작은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5점 미만으로 져도 결승에 올라갈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은 안이했던 것 같다. 방심해서 진 것은 맞다"고 밝혔다.
아시안 게임 2연패에 이어 1996 애틀랜타 올림픽까지 출전하며 클럽과 대표팀을 오가며 맹활약한 천은숙은 WNBA 진출설까지 흘러나왔다. 농구 센스는 물론 가드임에도 체격과 파워가 좋아 미국 스카우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다. 당시 정주현 코오롱 감독은 천은숙의 WNBA 진출을 위해 미국 출장까지 다녀왔다.
천은숙은 1일 <더팩트>와 인터뷰에서 "1995년부터 미국 이야기가 나왔다. 당시 미국인 코치들이 한국에서 클리닉을 개최하면서 저를 눈여겨봤었다고 한다. 올림픽을 앞두고는 코오롱 소속으로 미국으로 전지훈련을 갔다. 당시 대표팀과 연습 경기를 했었는데 미국 코칭 스태프들로부터도 눈도장을 받았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면서 "이후 정주현 감독님이 미국을 오가며 WNBA 진출이 구체화됐고, 1996시즌이 끝나고 미국으로 날아가 WNBA 팀에 합류해 입단 테스트를 받을 예정이었다"고 설명했다.
◆ 아킬레스건 부상, 방출 그리고 재기
하지만, 시련이 찾아왔다. 1996 올림픽 이후 곧바로 팀에 합류해 농구대찬치를 치렀던 천은숙은 현대와 경기에서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중상을 입었다. 천은숙은 "정확히 기억한다. 1996년 12월 28일 현대전에서 수비를 하던 도중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아킬레스건이 끊어졌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응급 수술을 받은 천은숙은 깁스를 하고 소속팀에 돌아왔으나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듣는다. 본인도 모르는 '은퇴 기사'가 나온 것이다. 사정을 알아보니 팀 개편을 맞아 정주현 감독과 함께 방출 통보를 받은 것이다. 정치 싸움에 휘말려 한순간에 팀에서 버림받은 것이다. 자연스럽게 WNBA 진출은 물거품이 됐다.
농구 선수로서 최고의 무대인 WNBA 진출이 좌절된 순간. 하지만 천은숙에게 미련은 없었다. 그는 "솔직히 미국 진출 좌절에 대한 아쉬움은 크지 않았다. 미국인 코치들이 '넌 분명히 WNBA에서 통한다'라고 이야기해줬으나 정작 나는 들뜨지 않았다. 너무 WNBA에 의식하지 않고 현재 내 상황에 충실하려 했다"며 "부상 당시엔 선수 생활에 대한 걱정이 가장 컸다"고 말했다.
한국인 1호 WNBA 진출이란 타이틀은 놓친 천은숙. 7년 뒤 '후배' 정선민()이 시애틀 스톰에 입단하며 한국인 처음으로 미국 무대에 진출했다. 천은숙은 여자농구 최초로 농구 본고장으로 날아간 정선민은 보면서 "후배가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니 과거가 생각났다. '아…내가 1호 진출이 될 수도 있었는데'라는 아쉬운 마음이 들긴 하더라"고 털어놨다.
이후 천은숙은 일본 덴소팀에서 코치와 재활을 동시에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귀국 후 코오롱 농구단의 해체로 갈 곳이 없었던 천은숙은 최고 대우를 받고 대만 다위안과 3개월 계약에 성공했다. 꼴지를 하던 팀을 준우승까지 이끌었다. 대만에서는 귀화까지 제안할 정도로 활약은 대단했다.
하지만 대만 리그에서 외국인 선수 제도가 없어지며 다시 한국에 돌아오게 된다. 천은숙은 1998년 당시 신생팀 신세계 쿨켓에서 한 시즌 활약한 뒤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 대학교-지도자-해설-심판-사회인 야구. 그리고 다시 농구!
은퇴 후에도 도전의 연속이었다. 천은숙은 지인의 설득으로 지난 2003년 대불대학교 창단 멤버로 입학해 2006년까지 선수로 뛰었다. 이후 지도자 길을 걸었다. 2009년까지 청솔중학교에서 4년 동안 코치를 맡았다. 2012~2013시즌엔 해설 위원으로 변신하며 농구와 인연을 이어갔다. 2013년 2월에는 대한농구협회 1급 심판자격증 취득해 전임 심판으로 활약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최근엔 사회인 야구로 변신했다. 세계 최초 여자 연예인 야구단 '한스타 여자 야구단' 창단 멤버로 1루수로 활약하고 있다. 그렇다고 농구와 인연을 끊은 것은 아니다. 올해 6월부터 '천은숙 농구교실'을 오픈했다. 동대문구민체육센터에서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농구를 가르치고 있다.
농구 1선에선 잠시 발을 뺀 천은숙. 하지만 그의 꿈은 농구 코트에 있다. 그는 "현재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으나 저의 꿈은 지도자다. 대표 선수 처음으로 심판 자격증까지 딴 것도 지도자로 가는 첫걸음을 떼고 싶어서였다"며 "여러이유로 아직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지만, 후배 선수들이 마음껏 농구를 즐길 수 있도록 좋은 지도자가 되고 싶다"며 최종 목표를 밝혔다.